이건, 일종의 복음이다. ‘뽀통령’ 뽀로로에 대한 이야기다. KBS <해피선데이> ‘1박 2일’에서 강호동이 아들에게 있어 자신보다 뽀로로가 더 인기라는 것을 고백한 것을 비롯해, 인터넷 곳곳에는 뽀로로의 이적(異蹟)에 대한 간증이 넘쳐난다. 주전자에 몸이 빠진 아기는 EBS <뽀롱뽀롱 뽀로로>(이하 <뽀로로>)를 시청하느라 울지도 않고 구조대원의 구조를 받았으며, 아침부터 단단히 삐친 딸아이를 뽀로로 모양 스테이크로 달랜 이야기도 눈에 띈다. 육아 블로그마다 <뽀로로>를 틀어놓으면 아이가 보채지 않아 좋다는 찬양의 기록이 남겨져있다. 아이들에게, 그리고 육아 중인 부모들에게 뽀로로는 진리요 빛이다. 3600억 원에 달하는 브랜드 가치와 캐릭터 상품 누적 매출 8300억 원(2010년 기준), 전 세계 110여 개국 방영 같은 실증적 데이터는 뽀로로에 대한 복음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아이를 키우지 않아도, <뽀로로>를 보지 않아도 이제는 모두들 뽀로로가 대세라 말한다.
사고-반성-화해가 이뤄질 수 있는 진심의 세계
하지만 너무 많은 찬양은 진리의 말씀을 덮는다. 뽀로로가 대세라 말하고 인정하는 사람들 중 <뽀로로>에서 뽀로로 외의 캐릭터 이름을 알고, 그들이 만들어가는 서사에 대해 아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현재 뽀로로의 인기에 대한 담론과 직접 뽀로로를 즐기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다.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유아 콘텐츠의 숙명일 수도 있다. 다만 그 간극이 멀어질수록 정작 뽀로로와 친구들의 자취는 희미해진다. 수많은 매체가 제작사 아이코닉스의 원 소스 멀티 유즈 전략을 칭송하지만, 아이들을 열광하게 만든 가장 첫 번째 원인은 바로 원 소스에 있다. 그런 면에서 <뽀로로>는 이 현상의 가장 근원에 있는 단 하나의 텍스트이자 바이블이다.
<뽀로로>의 성공 전략 중 하나로 많은 이들이 5~7의 짧은 러닝타임을 꼽는다. 유아들의 집중력이 5분 정도라는 연구 결과에 입각한 과학적 길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뽀로로>가 잘 만든 애니메이션인 건, 그 짧은 시간 안에 각각의 캐릭터가 어떤 사건 앞에서 서로 협동하거나 불화하는 과정을 겪고 무언가를 배운 뒤, 모두가 행복해지는 과정을 무리 없이 보여줘서다. “사회 활동이나 친구와의 우정 같은 카테고리를 미리 정한 뒤 에피소드를 구성”(아이코닉스 김종세 이사)하는 스토리라인에서 종종 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것은 뽀로로의 장난이다. 날고 싶어 하는 펭귄이라는 설정에서 드러나듯 호기심 많고 무척 활동적인 이 캐릭터는 농구를 하다 포비의 카메라를, 호기심에 에디가 만든 용수철 자동차나 미니 로봇을, 크롱이와 다투다 루피가 만든 음식을 망가뜨린다. 자칫 밉상 혹은 민폐 캐릭터가 될 수도 있지만 뽀로로는 그 때마다 자신의 잘못을 되돌리기 위해 궁리한다. 물론 궁리한다고 크롱이 몫까지 먹어버린 케이크가 돌아오거나, 에디의 로봇이 고쳐지는 건 아니다. 다만 잘못을 되돌리려 하는 것과 덮는 것은 전혀 다른 행동이다. 뽀로로의 사과는 매번 반복되지만 공허하지 않고, 그 때마다 친구들은 웃으며 받아준다. 5분 안에 사고-반성-화해가 이뤄질 수 있는 건, 사고의 크기가 작아서가 아니라 반성하는 진심이 통하기 때문이다.
뽀로로가 보여줘야 할 마지막 기적
유아로 설정된 뽀로로와 루피, 포비, 에디 등에게 부모가 없는 건 그래서 흥미롭다. 과거 MBC <뽀뽀뽀>의 뽀미 언니나 EBS <방귀대장 뿡뿡이>의 짜잔 형처럼 유아를 대상으로 한 콘텐츠에는 대부분 옳고 그름을 판별해주는 어른이 등장한다. 하지만 루피나 포비 등은 뽀로로의 실수와 장난을 받아들여주되, 어른처럼 윤리적 평가자의 역할을 하는 건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 누군가 실수하고, 뭔가가 망가지고 터지는 사건들은 정상적 일상의 균열이 아니라, 온갖 즐거움이 가득한 일상이다. 무엇이 친구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무엇이 옳은 행동인지는 그 일상의 모험 속에서 서로 배워나가는 것이다. 에디는 꾀병을 부리고 친구를 돕지 않았다가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해지자 자신의 이기심을 뉘우치고, 뽀로로는 밤에 피리 부는 괴물 흉내를 내서 친구들을 겁에 질리게 했다가, 친구들이 같은 방법으로 자기를 놀라게 하자 잘못을 깨닫는다. 다시 말해 <뽀로로> 안의 사회화는 어른들이 만든 윤리적 기준으로 말썽꾸러기 아이들의 일탈을 바로 잡는 것이 아니다. 말썽을 일으키고 친구들끼리 서로의 잘잘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 자체가 사회화다. ‘실수는 요츠바 일’이라고 말하는 만화 <요츠바랑!>처럼 <뽀로로>는 아이들이 저지르는 행동을 긍정해주고 오히려 북돋아준다. 너희는 틀린 게 아니라고, 더 많이 알아가기 위해 더 많이 실수하라고.
뽀로로에 대한 열광에서 잠시 벗어나 찬찬히 ‘그 분’의 말씀을 곱씹어봐야 하는 건 이 지점이다. 제작사는 “아이들이 실제로 노는 모습을 반영해” 뽀로로와 친구들이 술래잡기 하고 함께 블록 쌓기 하는 장면을 매 에피소드마다 보여주지만, 정작 뽀로로에 대한 간증에는 TV에 눈을 박고 친구들보다는 뽀로로 캐릭터 상품에 친숙한 아이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어른 입장에선 아이가 무늬만 유아용인 <짱구는 못말려>보다 <뽀로로>를 보는 게 훨씬 다행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안심할 수 있는 <뽀로로>의 교육적 메시지는 TV 너머에서 실현될 수 있다. 만약 뽀로로가 TV 바깥으로 나온다면 지금 아이들의 모습에 기뻐할까. 그래서 뽀로로가 보여줘야 할 마지막 기적은 아이들이 뽀로로에서 잠시 벗어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일지 모른다. 말씀의 실현이란 그런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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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위근우 기자 e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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