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성정은 기자] "아시아가 세계 정치ㆍ경제에 지각변동을 가져왔고 서에서 동으로 패권이 이동하고 있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의 말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해 아시아 지역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는 8.4%로 서방 선진국 평균(2%대)에 비해 훨씬 높다. 전 세계 GDP에서 아시아 GDP가 차지하는 비중도 올해 28%에서 2030년이 되면 40% 수준으로 급증할 것이란 게 IMF의 예측이다. 바야흐로 아시아의 시대다. 이런 아시아 파워의 중심에 '중국'이 있다.
'먼나라 이웃나라'의 저자로 유명한 이원복(사진) 덕성여대 교수는 요즘 아시아 연구에 흠뻑 빠져있다. 중국에 관한 책이라면 안 읽은 것이 없을 정도다. 그런 그를 지난 15일 서울 강남구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났다. 이 교수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제 서구가 힘을 잃고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시대가 열릴 것"이라며 "서구는 자신들의 근대화 방식만이 옳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며 우리는 아시아 시대에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인지, 근대화 과정에서 세운 사고 방식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영국, 일본, 미국, 중국. 그동안 그가 다녀본 나라를 꼽으려면 열손가락이 부족할 정도다. 여러 나라를 '그냥' 다닌 것도 아니다. 한 나라에서 길게는 수년을 지내기도 했고, 어떤 나라는 몇 번을 다시 찾아 이곳 저곳을 꼼꼼히 둘러보기도 했다. 그 나라와 관련된 책 수십 권을 읽는 것은 기본이다. 이렇게 눈으로, 귀로, 책으로 여러 나라를 '공부'한 이 교수의 말이라 더욱 솔깃했다.
서구가 왜 힘을 잃었는지를 설명하려 이 교수가 꺼내든 건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정의였다 . 러셀은 동양과 서양을 각각 3가지 단어로 정리했다. 서양은 '나'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플라톤의 철학, 절대적이고 유일한 신을 믿는 유대경전, 과학의 힘을 상징하는 갈릴레오로 정의된다. 이는 서양 사람들의 근본적인 의식 구조가 '나는 신 이외에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권력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구 열강은 이 같은 세계관을 바탕으로 영토적 제국주의를 실현해나갔고, 식민지 경영과 착취로 힘과 덩치를 키우는 데 성공했다.
반면에 동양 사람들의 사고 방식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말한 노자, 사회와의 조화를 강조한 공자, 내세에 대한 성찰을 가르친 석가모니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동양의 의식구조는 '자연과 사회에 대한 포용과 양보, 공동체적 가치'로 포용과 공존을 모르는 서양의 사고와는 사뭇 다르다.
이 교수는 이와 관련해 "먹고 먹히는 영토적 제국주의는 20세기까지만 통하는 얘기"라며 "지금의 국가 관계에서 절대적 군림은 있을 수 없고 이런 사고는 자연히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정복'을 외치는 서양의 사고를 강철에, '공존'을 말하는 동양의 사고를 솜에 비유하며 강철과 솜이 만나면 결국 경직된 강철을 밀어내는 건 유연함을 가진 솜이라고 말했다. 서양의 사고는 결국 힘을 잃고 동양의 사고, 아시아의 가치가 뜰 것이라는 말이었다.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동양과 서양의 만남은 이탈리아의 상인이었던 마르코 폴로로부터 시작된다. 1271년 보석상인인 아버지를 따라 동방여행을 떠난 마르코 폴로는 중국 각지를 여행하고 원나라에서 17년 동안 관직 생활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동방견문록'을 펴낸다.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 충돌로 바뀐 건 1793년의 일이다. 영국이 교역을 하려는 생각에서 조지 매카트니를 앞세운 사신단을 중국에 보냈는데 중국이 이를 단번에 거절하고 조공을 요구한 것이다. 천자 앞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하라는 중국과 일대일 교역을 하자는 영국은 서로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동ㆍ서양 사이의 충돌은 1,2차 아편전쟁으로 이어졌고 이후 중국과 일본의 개혁을 앞당기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 교수는 당시 중국과 일본이 어떤 방식으로 개혁에 나섰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일본은 스스로 문을 열어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다.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라는 뜻의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내세운 일본 국가 발전 전략은 일본인에게 콤플렉스로 남았다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서양 문물을 자신들의 문화보다 한 수 위로 보는 콤플렉스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콤플렉스가 일본이 지속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하나의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일본과 달리 중국은 중화 이외에는 모두 오랑캐라고 여기는 '중화사상(中華思想)'으로 근대화 시기를 버텼다. 이 교수는 중국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아 발전은 더뎠지만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인 중화사상을 고집했기 때문에 지금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구처럼 정복하고 군림하려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문화를 최고로 여긴다는 중국의 중화사상, 이 문화적 자존심이 결국 중국을 세계의 중심에 세울 것이라는 얘기였다.
아시아 시대에서 서구와 우리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던 이 교수는 "서구는 제국주의로 세계를 '정복'한 뒤 아직까지도 자신들의 사고 방식, 근대화 방식만이 옳다고 믿고 있다"며 "서구는 이게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지를 깨달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시아 시대에 우리의 역할에 관해선 "서구적 민주주의를 비롯한 서양 문물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탓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 서구의 사고 방식에 젖어들었는지도 모른다"며 "근대화 과정에서 이뤄 온 사고 방식이 옳은 것인지를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할 때"라고 조언했다.
이 교수는 인터뷰 말미에 조심스럽게 카이스트 얘기를 꺼냈다. 잇달아 터진 카이스트 자살 사건과 관련해 징벌적 등록금제, 영어 강의 문제가 불거졌는데 모든 강의를 왜 영어로 해야한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세계가 영어 중심 사회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는데 굳이 우리말, 우리가 가진 자부심을 버릴 필요가 있느냐는 조심스런 취지의 발언으로 느껴졌다.
◆이원복(65) 덕성여대 예술디자인학부 교수는 1975년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서다. 뮌스터 대학을 졸업한 뒤 같은 대학에서 서양미술사를 전공한 이 교수는 1981년 '먼나라 이웃나라' 연재를 시작한다. 1985년과 1986년엔 독일 뮌스터시와 코스펠트시 초청으로 개인전을 열었고, 국내에 돌아온 뒤에는 한국만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93년엔 우리나라 만화 문화 정착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제9회 눈솔상을 받기도 했다.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등에 이어 최근 중국 편까지 나온 '먼나라 이웃나라'는 누적판매량 1500만부, 권당 평균 140쇄 인쇄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다른 저서로는 '세계사 산책', '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 '신의 나라 인간 나라', '만화로 교양하라' 등이 있다.
글=성정은 기자 jeun@
사진=윤동주 기자 doso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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