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은행, 증권사, 보험사 등 금융업종의 회사들을 통틀어서 뭐라 불러야 할까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수십년간 '금융기관'이라는 명칭을 써왔는데, '기관'이라고 하니 '관(官)' 냄새가 너무 짙다는 것이 이유다. '금융기관'이라는 용어는 공공성, 안정, 관리, 통제, 타율의 느낌을, '금융회사'라는 이름은 수익성, 변화, 창의, 혁신, 자율이라는 키워드를 연상시킨다. 시대와 환경이 바뀐 만큼 그에 걸맞은 변화가 있어야 한다.
MB도 2009년 금융기관보다는 금융회사라는 명칭이 좋겠다고 공식 언급한 바 있다. 당시 민간부문에서는 환영을, 공공부문에서는 권위가 떨어진다며 불편한 반응을 보였지만 금융당국이 공식적으로 쓰면서 자리를 잡는 듯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특히 서민들이 일자리 구하기와 돈 빌리기가 어려워지자 금융권의 공익적 역할이 강조되면서 어느새 '금융기관'으로 되돌아갔다. 대형화, 리스크관리 강화, 지배구조 개편 등과 같은 공공의 이슈들도 '금융기관'화를 불러왔다. 금융당국도 다시 보도자료 등에 '금융기관'으로 표현하고 있다.
금융'기관'은 모름지기 나라경제 전반을 살피고 정부의 정책의지를 잘 파악해서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상품가격(금리)이나 서비스가격(수수료)을 적게 받는 등 공익에 기여할 바다.
요즘 물가가 화두이다 보니 전에 없던 새로운 '기관'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국제 원자재 가격이 폭등했는데도 국내 소비자물가를 염려해 이를 원가에 반영시키지 못하고 있는 제조'기관', 물가안정 깃발을 든 유통'기관', 가격구조 재편 압박을 받고 있는 정유'기관' 및 통신'기관' 등이 그 예다. 구제역에 따른 우유파동으로 공급가격을 올리려던 한 우유업체도 이를 철회하면서 우유'기관'이 됐다. 앞으로 당분간은 국익을 위해 제품가격을 올리지 않은 '기관'들이 더욱 등장할 터다.
전세대란이 더 심해지면 부동산중개업소들도 부동산중개'기관'으로 변모할지 모를 일이다. 정부가 담합 단속이라는 명목으로 업소들에 압박을 가하고 있지 않은가.
물가가 서민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어느 경제주체든지 인상요인을 최대한 스스로 흡수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다만 이 같은 '기관화'가 장기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인위적인 가격통제가 오래가면 생각보다 큰 부작용이 발생한다. 가장 걱정되는 점은 '불신 심리'다. 정부가 오죽 방도가 없었으면 기업들 팔 비틀기로 물가를 잡는가 하는 정책역량 불신이 그 하나다. 이번에 재미를 보면 다음 번에도 똑같은 수단을 쓰지 않겠느냐는 학습효과는 불신감을 더욱 키운다.
30%, 50% 오른 원자재 가격을 제품가격에 반영하지 않아도 견딜 수 있다면 그동안은 폭리를 취해왔다는 얘긴가라는 가격 불신이 고개를 든다. 기업들이 값은 올리지 않더라도 질이 낮은 원재료를 쓰거나 함량을 줄여 손해를 보지 않을 것이라는 품질 불신도 뒤따른다. 결국 기업 불신으로 확대돼 시장경제의 확신마저 흔들리지 말라는 법이 없다.
불신이 한쪽에 웅크리고 있어서야 대통령이 강조하는 단합이나 소통이 제대로 될 리 없다. 기업인들을 만나는 것은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라는 고위 관료의 강변이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이유다. 국제 원자재가격 폭등은 우리 정부뿐 아니라 전 세계 어느 정부도 막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 못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려운 상황에서 비상의 조치를 취하게 된 점을 있는 그대로 소통하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안정적인 자원 확보에 '올인'하는 것이 관(官)이 해야 할 바다.
김헌수 증권부장khs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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