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어쩌다 축음기 소리에 이끌려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바닥에 작은 나사 하나가 떨어져 있어도 그게 어느 부품인지 금방 압니다. 이게 내 삶입니다. 쉬운 길은 아니었지만 죽을 때까지 수집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내가 미친놈이라는 건 맞아요.(웃음)"
손성목 '참소리축음기·에디슨 과학박물관'(이하 참소리 박물관) 관장(사진· 69)은 50여 년 동안 세계 각국을 돌며 축음기, 영사기 등 에디슨이 발명한 기기들을 수집해 온 사람이다. 손 관장은 "에디슨은 미국인이지만 에디슨이 발명한 기기를 보려면 우리 박물관에 와야 할 것"이라며 자부심을 나타냈다.
손 관장은 지난 15일 휴넷 주최, 아시아경제신문 후원으로 여의도 한국투자증권 대강당에서 열린 '골드명사 특강'에서 수집가로 살아온 삶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소개했다.
그가 강원도 강릉 경포대 앞에서 운영중인 참소리 박물관에는 축음기 5000여점, 음반 15만장, 서적 5000여권, 기타자료 5000여점이 소장돼 있다. 30여개국에서 제작한 축음기, 뮤직박스, 텔레비전, 라디오, 전구, 영사기 등이 시대별 특징별로 정리돼 전시중이다. 이 중에는 에디슨이 발명한 세계 최초의 축음기 '틴포일 축음기'부터 최초의 탄소전구, 최초의 영사기인 '키네토스코프', 최초 전기자동차를 비롯해 다리미, 토스트기, 전화기 등 에디슨이 직접 발명한 기기들 2000여점이 포함돼 있다. 공간이 좁아 소장품들을 일정한 시간별로 돌아가며 전시하고 있다.
손 관장이 소리와 빛을 담는 기기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이날 강연에서 그는 다섯 살 무렵 여동생을 낳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향수, 그리고 친구를 사귀는데 큰 도움이 된 축음기 이야기로 부터 시작했다.
그는 함경남도 원산에서 백화점을 운영하던 아버지와 음대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집에는 축음기며 전축, 그랜드피아노 등 당시 꽤 값나가는 물건들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늘 피아노를 쳐주시던 어머니를 어린 나이에 여의면서 그에게 음악은 어머니에 대한 향수 그 자체였다. 축음기로 음악을 즐겨 듣던 소년시절, 그는 '엄마 없는 아이'라고 놀리는 친구들에게 축음기를 틀어주면서 가까워 질 수 있었다고 한다. 1952년 1ㆍ4후퇴 당시 동해안으로 피란을 갈 적에도 10kg가 넘는 무거운 축음기는 끝까지 챙겼을 만큼 그의 '축음기 사랑'은 어릴 때부터 각별했다. 손 관장이 피란와서 정착한 곳이 강릉이다.
손 관장은 삼십대 초반에 현대건설 계열사였던 한라건설의 자재부 차장으로 일했었다. 당시 사장이었던 이명박 대통령은 해외근무 때마다 수시로 축음기를 수집하는 손 관장을 보고 "너는 여기 일하러 왔니? 축음기 사러 왔니?"라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가 박물관 사업을 본격적으로 벌인 것은 회사를 그만두고 1979년 교사인 아내의 발령지인 강릉으로 가면서 부터였다. 강릉은 그에게 제2의 고향이다. 거기서 그는 소규모 임대아파트 사업을 벌였고 남는 수익으로 박물관 전시를 점차 확대해 나갔다. 이때부터 축음기를 만든 에디슨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발명품들을 지속적으로 사 모으기 시작했다. 이렇게 모으고 모아 만들어진 박물관이 지금의 참소리 박물관이다.
손 관장은 "축음기에서 비롯된 에디슨에 대한 존경이 나를 점차 수집광으로 만들었다"면서 "수집을 위해 현금을 지니고 다니다 강도나 납치를 당한 것도 여러 차례이고 어려운 고비도 많았지만 새로운 수집거리가 있으면 언제든지 달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함께 그는 세계 영화의 역사와 영화 관련 기기들을 주제로 하는 영화박물관도 건립할 계획이다. 또 어린이들이 좋아할만한 기기들을 전시하는 '어린이 박물관' 건립도 구상중이다. 그는 사후에는 박물관을 모두 사회에 환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오진희 기자 val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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