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양성평등 女리더 태부족
딸들의 꿈 꺾지 않는 사회되길
장면#1. 신무기 관련 국제회의가 열리고 있는 러시아의 한 회의장. 번쩍이는 훈장을 단 장성들 틈에 자그마한 여성이 유독 눈에 띈다. 옆 좌석의 남자가 말을 건다. "아니 이렇게 젊고 예쁜 아가씨가 왜 무기 같은 위험한 물건에 관심이 있는 거요?" '아가씨'는 한마디 툭 던진다. "나는 무기를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땄고, 무엇보다 이 무기를 내 맘대로 써 보고 싶어서요."
장면#2. 워싱턴DC의 한 건물. 치열했던 마라톤 회의를 마치고 모두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참석자' 중 한 명이 남아 테이블 위의 컵과 접시들을 치우고 있다. 그 장면을 한 기자가 목격한다. 기자는 그 '참석자'의 따뜻한 마음씨를 칭찬하는 기사를 썼다.
누구 얘기일까?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이 두 장면의 주인공이다. 지난달 서울에서 열린 한 콘퍼런스에서 라이스 전 장관은 첫 장면의 경험을 털어 놓았다. 그러자 몇 년 전에 읽었던 두 번째 장면의 기사가 떠올랐다. 세계를 쥐락펴락했던 여성도 전문성을 의심받고 컵을 치우는 미덕을 칭송받았다니. 여성 총리에게 위스키나 한잔 하면서 국무회의를 하자는 남성 국무위원들이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 지금은 나아졌을까? 불행히도 그렇진 않은 것 같다. 콘퍼런스 참석자들은 입을 모았다. 이제 어느 정도 제도나 법적인 개선은 돼 있으니 남은 것은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를 바꿀 때라고.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정부는 며칠 전에도 '가족친화적 일터만들기' 토론회를 열고 정책 반영을 모색했다. 정치계도 공식ㆍ비공식 할당제를 도입해 여성 국회위원이나 여성 당 최고위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기업도 육아휴직제, 직장 내 탁아소 등 여성들이 마음 편히 일할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했다. 학교에서도 양성평등 교육이 의무화됐다. 제도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현실은 어떤가? 얼마 전 간호부문 말고는 처음으로 여성 장성이 배출됐다. 기쁜 일이지만 여군 역사가 60년이나 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늦은 감이 있다. 필자가 공공부문에서 근무하던 몇 년 전까지도 여성은 공직에서 '희소가치'가 있으니 쉽게 고위공무원으로 올라갈 것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서 오너가문이 아닌 여성 임원은 아직도 희소하다. 40~50명씩 임원이 있어도 여성임원이 한 명도 없는 기업들이 부지기수다.
제도는 '당위성'을 반영한 것들이 많다. '제도적으로 선도'하기 위한 목적이다. 양성평등 관련 제도에도 그런 측면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여성가족부'가 있어 제도적으로는 앞선 것들이 많다. 그러나 제도가 실질적으로 실천되기 위해서는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가정교육이 중요하다. 아버지는 딸에게, 어머니는 아들에게 동등한 존재로서 이성을 존중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남자만이 할 수 있는 일, 여자가 해야 할 일에 대한 전형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면 안 된다.
라이스 장관의 경험담 한 가지 더. 국무장관 시절 아랍 국가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귀국길에 공항에 영접을 나온 한 고위각료가 그녀를 따로 찾았다. 교리 때문에 여성인 라이스 장관과 악수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각료 뒤에는 온 몸을 검은 차도르로 칭칭 감고 눈만 내놓은 앳된 소녀가 있었다. 각료는 자신의 외손녀라며 소녀의 장래 꿈이 국무장관이라고 소개했다. 외손녀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는 할아버지의 눈빛에서 라이스 장관은 희망을 보았다고 했다.
2011년이 코앞에 다가왔다. 내년은 올해보다 더 나은 한 해가 될 것이다. 특히 진정한 양성평등의 문화가 뿌리 내리는 해가 되기를 바란다.
조미나 IGM(세계경영연구원)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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