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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황용희 기자]'한국 가요계의 거목' 작곡가 박춘석옹(본명 박의병)이 14일 오전 6시 서울 강동구 둔촌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80세.
그는 그동안 남진의 '가슴아프게'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 '기러기 아빠' ,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 패티김의 '초우' 등 한국 최고의 노래들을 다수 작곡한 한국가요계에 큰 어른이었다. 작품수만도 2700여곡.
그는 1930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고와 서울대 음대 기악과를 졸업했다.
박옹이 가요계에 첫발을 내딘 것은 경기중학 5학년(고교 2년)인 1948년. 당시 서울대에 다니던 길옥윤씨와 만나 음악활동을 함께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데뷔곡은 최양숙이 부른 '황혼의 엘레지'. 어릴때 고무 공장을 하시는 아버지 덕에 피아노와 오르간을 접한 것이 자유자재로 화음을 생산해낸 계기가 됐고, 이것이 그의 음악인생의 시작을 이끌게 된 것.
그는 작품 활동 당시 특유의 검은 테로 안방극장에 큰 화제를 남겼다. 그의 히트곡중 최고의 히트곡은 바로 손인호가 부른 '비내리는 호남선'이었다. 그는 특유의 감성으로 한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미자 남진 나훈아 패티김 등 한국 최고 가수의 조련자이자 동반자로 한국 가요계를 이끌었다.
'살아있는 트로트의 전설'로 평가받아온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왔다. '음악과 결혼했다'며 창작활동에만 전렴함으로써 지금까지 약 2700곡을 발표할 수 있었다. 고 길옥윤씨와 더불어 많은 히트곡을 남길 수도 있었다.
끝없는 창작열을 불태우던 박옹이 건강에 문제를 일으킨 것은 지금으로부터 16년전. 갑자기 찾아온 뇌졸증이 그를 발목을 잡았다. 이미자의 '노래는 나의 인생'을 작곡한 직후였다. 9년전에는 폐렴으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후 뇌졸중의 후유증은 오늘날까지 계속됐다.
독신인 그를 지켜온 사람은 바로 그의 동생이자 작곡가인 박금석씨(78). 박씨는 형 춘석옹이 살고 있는 둔촌동 인근에 함께 살며 저작권료로 병원비와 생활비를 충당해왔다. 사람을 알아볼 수 없는 형 춘석옹을 위해 24시간 간병인을 대왔다.
제1회 대민민국 연예예술상(1994), 옥관문화훈장(1995) 등을 수상한 '한국최고의 작곡가' 박옹이 가장 좋아했던 노래는 바로 '가을을 남기고 산 사랑' '가시나무 새' 등이었다.
불꽃처럼 살다간 박옹의 영전에 수많은 한국 대중문화계 인사들이 추모가 줄을 잇고 있다.
한국저작권협회(회장 신상호)의 한 인사는 "불꽃처럼 살다간 그를 한국가요계 모든 인사들이 추모하고 있다. 협회는 마지막 가시는 그분을 위해 협회장으로 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가족들과 상의해서 결정할 것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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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용희 기자 hee2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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