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광이 좋은 산들은 주말이나 휴일이면 등산객들로부터 심하게 짓밟힐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등산인구가 최근 10여년간 수백만명으로 늘어난 계기가 외환위기를 겪으며 직장을 잃었던 가장들로부터였다는 가슴 아픈 현실을 먼저 생각해봅니다.
에베레스트 최고봉에 서서 산소마스크를 낀 채 태극기를 흔들었던 한국의 1세대 산사나이들을 통해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꿈을 키웠던 게 돌아보면 엊그제 같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챔피언 벨트를 차기 위해 태극마크가 박힌 사각팬티를 입고 피투성이도 마다않고 링에 올랐던 배고픈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히말라야 산봉우리들이 우리 등반대끼리의 각축장이 되었는가 하면 사생결단의 힘든 권투는 젊은이들에게 돈이 되지 않는 기피종목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산들이 일상의 체력 단련장으로 변하고 영광의 권투종목이 다이어트 수단으로 바뀌는 데 겨우 한 세대도 걸리지 않았지요. 대신 우아하게 골프채를 든 신세대들이 세계무대에서 역시 저희들끼리 우승경쟁을 하는 시대입니다.
10년쯤 전에는 아무도 한국 여성들끼리 히말라야 고봉 14개를 완등하기 위해 사투(?)를 벌일 것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은선과 고미영이란 40 초반의 두 여성이 8000m급 설산들을 정복하기 위해 벌였던 선의의 경쟁이 결국에는 한 사람의 추락으로 슬픈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경쟁의 끝은 과연 어디까지인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상업화한 저널리즘과 스포츠용품 산업들이 두 젊은이들로 하여금 산행을 재촉하도록 한 책임이 작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밟는 도전과 개척의 발자국보다 각자가 들고 올라 간 기업의 깃발들이 더 조명을 받는 왜곡된 경쟁의 현실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히말라야 등반코스가 일반인들의 트레킹코스와 섞여서 아마추어 산악 동호인들도 대수롭지 않게 찾는 곳이 된 듯합니다. 등반인들이 높고 험한 산들에 더 이상 경외심을 갖지 않게 된 건 국내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입니다. 다치고 죽을 확률로 보면 실은 히말라야 8000m급 14개 봉우리보다 더 위험한 곳이 북한산을 비롯한 서울의 근교 산들인데 말입니다.
산길에선 손을 잡은 연인들도 만나지만 때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고독한 젊은이도 만납니다. 첫 출근을 앞두거나 뭔가 다른 일을 시도할 때도 산을 오르내리며 다짐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산은 계절을 달리할 뿐 늘 같은 자리에서 남녀와 노소를 구별하지 않고 다 받아들이기에 찾는 사람들이 늘어만 갑니다.
외쳐도 들어주고 써줄 사람이 없을 만큼 인권이 탄압받던 시절에는 산이야말로 민주화의지를 불태우고 대권을 준비하기 위한 유일한 집회장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번민하던 전직 대통령이 새벽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합니다.
헉헉거리며 산에 오르는 이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러니 목숨을 걸고 연례행사처럼 멀리 눈 덮인 히말라야 골짜기를 오고가는 이들을 이해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차제에 차가운 주검 앞에서 우리 등산객들이 좀 더 경건하게 산을 대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휴식과 충전을 위해 오른 산에서 영원한 휴식을 할 수도 있으니···
경쟁하다시피 산을 오르면 본의 아니게 나무를 해치게 됩니다. 나무는 연약한 뿌리가 땅밖으로 드러나면 본능적으로 보호를 한답니다. 마치 사람의 피부가 벗겨지면 진물이 나고 딱지가 앉아서 상처가 아무는 수순과 같이 뿌리 겉에 수간처럼 딱딱한 외피가 형성되는 것이죠.
문제는 사람들이 그 노출된 뿌리의 맨살을 계속 밟고 다닌다는데 있습니다. 오르는 인간보다 더 힘겨워하는 산을 위해서, 이번 휴일 산행에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까운 젊은이들을 생각하며 드러난 뿌리에 한줌 흙을 덮어주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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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펑론가 김대우 pdik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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