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0월. 그날은 미국의 주식가격이 대폭락한 날입니다. 그리고 다음해 극도의 경제적 불황이 미국전역을 강타했습니다. 경제학자들은 여기에 대공황이라는 용어를 붙였습니다.
불황이 닥치면 그 다음수순은 거리로 내몰리는 실업자행렬입니다. 그때의 미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실업자가 양산됐습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4년 뒤(1933년)에는 거대한 모래바람이 미국을 덮쳤습니다. 중서부와 서남부는 쑥대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부분의 농경지와 곡물을 초토화시켰습니다. 이 때문에 농토를 잃은 농민이 20만명을 헤아리게 됐습니다. 모래와 먼지 때문입니다. 이들은 유랑난민이 됐습니다. 이들은 고달픈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당시에 쓰여진 소설 중에 ‘분노의 포도’라는 게 있습니다. 대공황 때 실업과 가난에 시달리며 대륙을 전전하는 일가의 비극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존 스타인벡에 의해 1933년에 발표된 장편소설이지요. 존 스타인벡은 이 소설을 통해 일자리를 찾아 떠난 실업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클라호마 주 일대에 불어 닥친 모래바람으로 농토가 피폐됐다. 기계화된 영농회사의 대자본에까지 밀려 더 이상 고향에서 살수 없게 된 ‘조드’일가는 캘리포니아로 떠날 준비를 한다. 조드 형제는 새로운 희망을 안고 멀고도 험한 서부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캘리포니아로 가는 길에는 이주민들의 고물자동차가 줄을 이었다.
그들은 애리조나 주의 험난한 산을 넘고 사막을 지나 갖은 고생을 했다. 캘리포니아에 도착해보니 그곳에는 25만명의 이주민이 모여 있었다. 조드 일가 앞에는 꿈꾸어 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현실-기아와 질병 그리고 가진 자의 학대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이주민이 모여사는 부락에 천막을 치고는 그곳에 머무른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이같이 어려운 역경을 이겨내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단돈 몇 달러의 임금을 더 받기 위해 수백 Km의 장거리이동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몇 센트의 빵값을 아끼기 위해 아낙네들끼리 다니기도 했습니다. 단돈 1달러 때문에 살인까지 할 정도로 그들의 삶은 절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분노의 포도’가 등장합니다. 주인공들은 기름진 땅에 열매를 맺은 포도를 보고 분노를 참지 못합니다. 왜 아름다운 포도송이를 보며 분노를 느꼈을까요? 이들에게는 처절한 절망감과 가진 자에 대한 증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의 긍지와 생존권을 상실했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포도송이보다는 농장주들이 미웠을 수도 있습니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이 나온 지 7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지금 미국경제가 대공황 때에 버금가는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실업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파이낸셜타임스에 나온 ‘캘리포니아 드림이 악몽됐다’(조선일보 인용)는 보도가 눈길을 끄는 이유도 그래서인가 봅니다. 미국의 풍요를 상징하던 캘리포니아주가 실업과 빈곤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빈곤층에 지급되는 식량쿠폰을 받으려는 주민수가 1년 전보다 65%나 늘었다니 문제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다 동유럽발 디폴트(채무불이행)설이 확산돼 2차 금융위기의 경고등이 켜졌습니다. 러시아에 이어 루마니아, 헝가리, 체코까지 위기가 전이돼 통화가치가 폭락, 유럽전체에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그러니 투자자금이 급속도로 빠져나가고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 도미노가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이 때문에 세계금융시장 역시 급랭기류를 타고 있습니다.
눈을 국내로 돌려봐도 두려움의 정도는 같습니다. 3월 위기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지 않습니까? 정부의 공식적인 부인이 사실이기를 바랄뿐입니다.
지금 거리로 내몰리는 백수행렬을 접하며 ‘분노의 포도’를 연상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며칠 전 우리나라의 사실상 백수가 346만명에 이른다는 통계가 발표됐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실업자에다 취업준비생, 구직포기자, 그냥 쉬는 사람, 현재 직장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일자리를 구하는 구직자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사실상 백수가 1년 사이에 26만명이나 늘어났습니다. 카드대란 때의 1.6배, 통계청이 자료를 만든 이후 최대입니다.
시대가 돌고 돌아 또 다시 존 스타인벡이 그리는 ‘분노의 포도’가 쓰여질까 걱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야의 2월 국회 기(氣)싸움을 보고 있노라면 정치인들이 ‘분노의 포도’ 단초를 제공할까 두렵기도 합니다. 누구를 위한 정치인지, 그들의 존재이유를 떠올려보기도 합니다.
346만명의 ‘사실상 백수’들이 포도송이를 보며 분노를 느끼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선진국 진입이 그만큼 더뎌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야기가 세상을 바꾼다’를 쓴 홍사종 선생님은 존 스타인벡의 소설에서 인간의 또 다른 내면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실이 각박하고 되는 일이 없을수록 인간은 물건을 사기보다 꿈을 사려한다는 것입니다.
외환위기 때 아내들이 외식비를 줄여도 교육비를 줄이지 않은 것 역시 또 다른 미래인 아이들의 꿈을 사는 비용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얘기입니다.
이 소설에서 실직자들은 먹고살기 위해 사력(死力)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읍내에 새로 들어온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었습니다. 홍사종 선생님은 이들이 영화표를 사는 것을 꿈을 사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처절한 절망감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들이 미래에 대한 꿈과 긍지를 잃지 않고 영화표를 사듯이 꿈을 사게 하면 우리에겐 그래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 역할을 누가 해야 할까요?
“꿈은 쓰러지지 않는다. 꿈은 절망을 몰아낸다. 꿈은 바라보는 대로 된다. 꿈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차동엽 신부님의 말을 되새기며 하루를 시작해 봅니다.
권대우 아시아경제신문·이코노믹리뷰 회장 president@asiaeconom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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