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준기자
밀가루·설탕 담합으로 10조원에 이르는 부당 이득을 챙긴 식품기업과 전·현직 임원들이 무더기로 재판에 넘겨진 가운데 이들 기업은 가격 인상을 통해 수익성을 크게 끌어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수년간 '빵플레이션', '슈거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치솟은 원재료 값은 식품 가격 인상으로 이어지며 소비자 부담을 키웠는데, 식품 기업들은 담합을 통해 배를 불리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5일 식품업계에 따르면 검찰이 최근 기소한 밀가루 담합 사건은 한국제분협회 7개 회원사가 모두 가담했다. 각 사 공시자료를 토대로 분석한 국내 밀가루 시장은 2024년 기준 1조3000억원 규모로 대한제분과 사조동아원, CJ제일제당 등 3사가 70% 넘는 점유율을 가진 독과점 구조다. 삼양사(10%)와 대선제분, 삼화제분, 한탑 등의 점유율은 한 자릿수에 그친다.
검찰 조사 결과 이들 제분 회사는 2020년 1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5년 9개월 동안 5조9000억원대 밀가루 가격을 담합했다. 코로나19 대유행을 기점으로 글로벌 공급망 위기가 덮친데다 2022년 러시아가 세계 최대 농산물 수출국인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시작된 전쟁 여파로 밀가루의 원재료인 소맥 가격이 급등한 것을 빌미로 담합을 통해 가격을 대폭 올린 것이다.
하지만 이후 공급 불안이 해소되고 밀가루 수요 둔화로 소맥 가격은 하향세를 보였는데, 이들 제분업체는 공급가격을 소폭 내리는 데 그쳤다. 그 결과, 이들 기업의 실적은 가파르게 개선됐다. 일례로 국내 밀가루 제조 1위 기업인 대한제분은 밀가루 매출이 2020년까지 3000억원을 소폭 웃도는 수준이었는데, 2021년 3460억원, 2022년 4600억원, 2023년 4900억원까지 뛰었다. 이후 매출은 소폭 줄어들긴 했지만 지난해 3분기까지 누적매출은 3464억원으로 밀가루 가격 담합 전 연간 매출을 웃돈다.
이 회사의 영업이익 상승률은 더욱 가파르다. 대한제분은 2019년 영업이익 74억원에서 밀가루 담합 첫해인 2020년 150억원대로 늘었고, 2022년 200억원을 돌파한 데 이어 이듬해 379억원, 2024년 479억원까지 불어났다. 지난해 3분기까지 누적 영업이익은 289억원이다 .
사조동아원도 마찬가지다. 이 회사는 2020년 매출액이 2800억원에서 2024년 4400억원대로 급증했다. 사조동아원은 제분 사업부 영업손익을 별도로 공시하지 않는데, 이 기간 전체 영업이익은 160억원에서 500억까지 뛰었다. 사료 사업부 당기순이익이 적자가 빈번했던 만큼 밀가루 가격 담합으로 수익성이 크게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 CJ제일제당과 삼양사는 제분 실적을 따로 공시하지 않는다. 이 밖에도 영업적자 기업이던 한탑은 흑자로 전환했고, 대선제분과 삼화제분도 실적이 고공 행진했다.
제분업계 밀가루 가격 담합 의혹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국내 밀가루 업체들은 1963년 가격 담합이 처음 적발된 이후, 2006년에도 담합이 드러나 7개 제분업체 모두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총 434억17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은 바 있다. 공정위 과징금은 담합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매출액을 기준으로 위반 행위의 중대성에 따라 0.5~20% 범위에서 과징금을 부과한다. 과징금보다 담합으로 벌어들인 수익이 훨씬 큰 만큼 상습적인 담합이 이뤄졌다는 이야기다.
2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검에서 나희석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 부장검사가 서민경제 교란사범 집중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설탕값 담합은 1990년대 수면 위로 올라왔다. CJ제일제당·삼양사·대한제당 등 국내 3개 제당업체는 지난 1991년부터 2005년까지 출고량과 가격을 담합한 행위가 적발됐고 공정위는 2007년 총 511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2011년에는 제당 3사가 유사하게 가격을 인상하면서 담합 의혹이 제기됐고, 지난해 조직적인 담합 움직임을 포착해 CJ제일제당 전직 임원 등이 구속됐다.
이들 설탕 3사는 2021년 3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3조2700억원 규모의 담합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이들 기업이 설탕의 원재료인 원당 가격이 2021년 1월 기준 386원에서 2023년 10월 기준 801원으로 상승하는 동안 설탕 가격을 720원에서 1200원으로 신속히 인상한 반면, 원당가가 지난해 4월 기준 578원까지 인하했지만 설탕 가격은 1200원에서 1120원으로 소폭 인하해 소비자들이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제당3사가 이익을 취했다고 밝혔다.
실제 이들 업체가 담합을 벌였던 기간 동안 밀가루는 최고 42.4%, 설탕값은 최고 66.7% 오른 것으로 조사됐다. 이처럼 원재료 값이 오르면서 완제품 가격도 동반 상승했다.
밀가루·설탕 가격 담합이 이뤄지던 2020년 1월부터 직격탄을 맞은 식품업체는 제품값을 줄줄이 올렸다. 오뚜기는 2021년 8월 11.9%, 2022년 9월 11%, 지난해 4월 7.5%를 인상했다. 삼양식품도 2021년 9월 6.9%, 2022년 11월 9.7%가량 가격을 올렸다. 농심은 2021년 8월 6.8%, 2022년 9월 11.3%, 지난해 7.2% 인상했다.
파리바게뜨의 제빵가격도 2021년 2월 5.6%, 2022년 2월 6.7%, 2023년 2월 6.6%, 지난해 2월 5.9% 인상됐다. 설탕 담합이 이뤄지던 기간이던 지난해 6월 롯데칠성음료는 6개 제품에 대해서 가격을 6.9% 인상했고 hy의 발효유는 평균 16.3% 인상됐다.
법조계에서는 식품업체들이 원재료 가격 담합으로 인해 손해배상 청구 소송 등을 제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다만 원재료를 계속 공급받아야 하는 식품업체 입장에서 밀가루·제당 업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결국 공정위의 과징금 처분 등을 통한 부당수익 환수만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밀가루·설탕 가격이 오르면 식품 가격은 오를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원재료 업체가 가격 담합을 했더라도 (식품업체가) 소송을 제기하기는 불가능하다"며 "아마 모든 식품업체가 소송을 준비한다거나 계획하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