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시각]'검은머리 외국인' 총수의 국적

전 세계에서 한국에만 있는 재벌 규제가 있다. 공정거래법상 '동일인(총수)' 지정 제도다. 공정거래위원회는 해마다 5월이면 자산 5조원 이상의 대기업집단을 발표하는데, 이때 지분율과 실질적 지배력을 고려해 총수도 함께 정한다. 총수로 지정되면 배우자뿐만 아니라 친인척이 보유한 계열사 지분과 거래 내역을 제출해야 한다. 단순 자료 누락도 제재의 대상이 되고, 허위 사실이 있으면 형사처벌의 칼날이 기다리고 있다. 토종 한국인 재벌 총수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규제다. 하지만 쿠팡 김범석 의장은 예외다. 2021년 쿠팡이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됐지만 김 의장이 '검은머리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5년째 총수 지정이 면제됐다.

김 의장은 한국 쿠팡의 미국법인이자 모회사인 쿠팡Inc 지분을 10.2% 들고 있지만, 차등의결권 부여로 전체 의결권의 76%를 틀어쥐고 있다. 쿠팡 경영의 전권을 휘두르는 실질적 지배자다. 모회사가 미국에 본사를 두고 뉴욕증시에 상장했지만, 연간 41조원이 넘는 매출액의 대부분은 한국에서 올리고 있다. 한국 소비자를 상대로 돈을 벌고 국내 e커머스 시장 1위 지배력을 누리면서도 주요 의사결정은 미국인이 좌우하는 이 기이한 구조는 총수 지정 논란의 중심에 있다.

쿠팡이 그동안 총수 지정을 피한 핵심 근거 중 하나는 '친족이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런데 김 의장 동생인 김유석 부사장이 쿠팡 물류 운영을 총괄하며 최근 4년간 140억원의 보수를 받아온 사실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공시로 뒤늦게 드러났다. 공정위는 서울 송파구 쿠팡 본사에서 벌이고 있는 현장조사에서 친인척이 주요 의사결정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녹취나 메시지, 이메일 등의 물증을 확보 중이다. 사실관계가 입증되면 쿠팡 총수를 법인에서 김 의장 개인으로 변경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허위 자료 제출의 책임을 물어 김 의장과 쿠팡 법인에 대해 형사처벌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지난 정부에서 공정위는 외국인 총수 지정에 상당한 부담을 느꼈다. 제도 도입 이후 지난 40년간 외국인이 총수로 지정됐던 전례가 없어서다. 공정위 한 고위 관료는 이전 정부에서 시행령까지 바꿔 김 의장과 김 의장 일가에 총수 지정 면죄부를 줬던 것도 "(외국인 총수 지정이라는)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부담감이 작용했다"고 전했다. 정책적 판단에 따른 결과든, 통상 마찰을 무기로 전방위 압박 공세를 펼쳤던 쿠팡의 위세에 눌렸든 전임 정부에서 쿠팡과 김 의장에 대한 법 집행에 눈을 감았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동일인 제도 자체의 한계와 문제도 분명히 있다. 동일인 제도는 1980년대 오너 일가 중심의 지배구조에서 편법 상속과 경제력 집중의 폐해를 막기 위해 설계됐다. 태생 자체가 국내 기업을 전제로 하다 보니 외국인을 총수로 지정해 규제하기에는 현실적인 무리가 있다. 공정위가 당장 미국 델라웨어주 윌밍턴 본사로 날아가서 한국에서처럼 현장조사를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해외엔 없는 국내법을 근거로 해외 계열사에 제재를 가한다면 통상 이슈나 외교적 마찰 등에 맞닥뜨릴 수도 있다. 가뜩이나 트럼프 정부가 관세를 볼모로 한국의 대미 투자 집행을 연일 압박하는 상황에서 쿠팡을 둘러싼 통상 갈등이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다. 제도 자체의 한계로 규제에 따른 실익이 낮고 처벌이 어려운 현실에서 외국인 총수 재지정 여부와 동일인 제도 자체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지 공정위의 고심이 깊다.

경제부 세종=조유진 기자 tint@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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