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민기자
지난해 말 외환당국의 고강도 시장 개입 이후 진정세를 보이던 원·달러 환율이 새해 들어 다시 들썩이고 있다. 지난해 말일부터 9거래일 연속 오르더니 단숨에 1470원 선 위로 올라섰다. 당국이 개입을 통해 간신히 환율 수준을 낮춰놨으나 결국 다시 12월 수준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정책 수단을 총동원한 정부의 개입으로 당시 꺾이는 듯했던 환율 상승 기대심리가 새해 들어 되살아난 영향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원화와 동조되는 엔화가 약세 기조를 이어가고 있는 것도 환율 상승을 부추기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실제 개입이 있었던 1480원에 근접하는 수준까지 환율 상승 흐름이 이어질 것으로 봤다.
14일 서울 외환시장에 따르면 원·달러 환율 주간거래 종가는 지난달 30일부터 이달 13일까지 9거래일 연속 올랐다. 1440원 안팎에 머물던 환율은 전날 기준 1473.7원에 주간 거래를 마쳤다. 9거래일 만에 43.9원이 오르면서 전날 종가는 지난달 23일(1483.6원) 이후 최고가를 기록했다.
이날도 환율 오름세는 이어지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 대비 3.5원 오른 1477.2원으로 출발해 오전 9시30분 기준 상승 폭을 점차 확대했다.
원·달러 환율은 지난해 12월24일 외환당국의 고강도 개입으로 3년1개월 만에 최대 낙폭을 기록하며 1450원 선 밑으로 내려앉았다. 이후 29일에는 1429.8원까지 떨어졌다. 당시 전문가들은 당국이 시장의 환율 상승 심리를 꺾는 데 일차적으로 성공했다며, 당분간 1440~1450원 선에서 유지할 것으로 봤다. 하지만 환율은 새해 내내 오르며 정부의 개입이 있었던 1480원 선을 다시 위협하고 있다. 시장에서도 "예년 대비 방향성을 예측하기가 힘들어지고 있다"는 반응이 나온다.
연합뉴스
최근 환율이 다시 오르고 있는 것은 장기간 고환율이 유지됐던 배경인 '수급 불균형'이 구조적으로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정부의 개입으로 환율이 하락하자 개인 투자자들은 해외 투자를 다시 늘리고, 수입업체들은 달러 매수를 확대하면서 달러 수요가 크게 늘었다. 반면 수출업체들의 달러 매도 움직임은 주춤한 상황이 연초에 반복되고 있다.
실제 국내 거주자의 미국 주식 순투자 규모는 올해 들어 다시 확대되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이달 1~13일 국내 개인 투자자의 미국 주식 순매수 규모는 22억162만달러로 집계됐다. 관련 통계 집계를 시작한 2011년 이후 같은 기간 역대 최고치다. 미국 주식 투자 광풍이 불었던 지난해 동기(15억4881만달러)와 비교해도 42% 늘었다. 임환열 우리은행 연구원은 "환율이 하락하면서 개인 투자자와 수입업체가 오히려 이 시기에 달러를 더 사들인 것이 환율을 끌어올렸다"며 "미국 주식이 다시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가 되살아나면서 미국 주식 순매수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반면 수출업체들의 네고 물량(달러 매도 물량)은 시장에 풀리지 않고 있다. 임 연구원은 "당초에는 정부 개입 이후 수출업체들이 보유한 달러를 대거 매도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그러지 않았다"며 "정부가 개입한 이유 중 하나인 수급 문제가 여전하며, 환율이 잠깐 조정받았을 뿐 구조 자체가 바뀌지 않아 되돌림 현상이 일어난 것"이라고 짚었다.
이런 구조적 수급 불균형의 기저에는 환율이 더 오를 것이라는 기대심리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지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국제금융팀 부연구위원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2021년 이후부터 달러 강세와 해외투자 확대로 환율 상승세가 장기화하면서 환율 상승에 대한 기대심리가 강화했다"며 "최근 환율 급등세가 지속되는 이유도 환율 추가 상승에 대한 기대심리 상황에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임 연구원 역시 "수출업체가 달러를 계속 보유하는 것은 환율에 대한 불안감이 여전하기 때문"이라며 "해외투자 확대와 함께 달러 보유 심리도 강해졌고, 환율이 추가 상승할 것으로 예상해 물량을 내놓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여기에 엔화 약세와 중동 불안으로 인한 강달러 현상 등 대외 여건도 원화에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환율 오름세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하며, 과거 정부 개입이 있었던 1480원 선 돌파 여부에 주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시장의 당국 개입 경계감이 여전한 만큼 1480원이 마지노선이 될 것이며, 이를 넘어설 경우 재개입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백석현 신한은행 S&T센터 연구원은 "미국의 12월 인플레이션이 예상을 밑돌았지만 이란 사태와 유가 상승 등 중동 리스크가 원화에 부담이 되고 있다"며 "엔화 약세까지 가중되며 이날 환율은 1478원 수준에서 등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 연구원은 "1470원까지 빠르게 올랐기에 단기적으로 상승 모멘텀이 강해질 것"이라면서도 "우리나라의 펀더멘털 대비 원화 약세가 과도한 만큼 1480원 선이 고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시장도 정부의 개입 경계감을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환율 진정을 위해서는 일관된 정책 대응으로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 부연구위원은 "외생적·구조적 요인의 비중이 커질수록 외환당국이 직접 통제하기 어려운 충격이 확대되는 만큼, 일관된 대응을 통해 경제주체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짚었다. 또한 "원칙적으로 환율은 시장에서 결정되도록 하되, 급격한 쏠림으로 시장 기능이 훼손될 때만 질서 있는 거래를 지원하는 범위에서 대응해야 하며, 상시적 개입으로 오인되지 않도록 투명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