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길기자
5일 세상을 떠난 배우 안성기를 두고 영화계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는 남다르다. 위대한 연기자를 잃은 상실감을 넘어, 지난 70년간 한국 영화계를 지탱해온 거대한 '도덕적 기둥'이 무너졌다는 부재감에 닿아있다.
연합뉴스
고인은 스크린 안에서는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였지만, 스크린 밖에서는 그 누구보다 엄격한 자기 절제와 따뜻한 리더십을 보여준 '진짜 어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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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데뷔 후 170여 편의 영화를 찍는 동안 고인은 단 한 차례의 스캔들이나 구설에 휘말리지 않았다. 철저한 자기 관리 덕분이지만, 동료들은 그 비결을 타인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밴 천성에서 찾는다.
영화 현장에서 그는 '신사적인 배우'로 통했다. 촬영장에 항상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해 대본을 점검하는 루틴은 수십 년간 변함이 없었다. 자신의 촬영 분량이 없어도 현장에 남아 막내 스태프의 이름을 불러주며 격려하고, 식사 시간에는 직접 식판을 들고 배식 줄을 섰던 일화는 유명하다.
이준익 감독은 "안성기 선배는 현장의 '공기'를 바꾸는 분이었다. 감독이 예민해져 소리를 지르려다가도, 구석에서 묵묵히 대기하는 안 선배를 보면 저절로 마음을 다잡게 된다는 감독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광고계의 전설이 된 '38년 의리'도 그의 성품을 보여준다. 고인은 1983년부터 동서식품 커피 모델로 활동하며 '단일 브랜드 최장수 모델' 기록을 세웠다. 그는 이미지 소비를 막기 위해 타사 식음료 광고 제안을 모두 거절했고, IMF 외환위기 당시 광고주가 모델료 인상을 제안하자 "모두가 어려운데 그럴 수 없다"며 자진 삭감 및 동결을 역제안했다. 이 신뢰 관계는 2021년까지 38년간 이어졌다.
부드러운 미소 뒤에는 강인한 투사의 면모가 숨어 있었다. 한국 영화 산업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가장 먼저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로 나선 이는 항상 안성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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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2006년 스크린쿼터(한국 영화 의무상영제) 축소 반대 투쟁이다. 당시 '스크린쿼터 사수 영화인 대책위' 공동위원장을 맡은 그는 영하의 날씨에도 광화문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평소 정치적 발언을 삼가던 그였지만, 영화 생태계가 위협받자 주저 없이 마이크를 잡았다.
당시 고인은 "영화는 단순한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얼과 영혼이 담긴 그릇"이라며 "할리우드 자본에 맞서 우리 문화를 지키는 최소한의 방패가 필요하다"고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그의 진정성 있는 호소는 영화인들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 됐고, 국민적 지지를 끌어냈다.
2009년에는 불법 복제로 신음하던 시장을 살리기 위해 박중훈과 함께 '굿 다운로더' 캠페인을 주도했다. "제 돈 내고 영화 보는 문화를 만들자"는 그의 외침은 대중의 인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 후배 배우들이 캠페인에 대거 '노 개런티'로 참여한 것 역시 안성기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감 때문이었다.
그의 시선은 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밖, 소외된 곳을 향했다. 고인은 2003년부터 아시아나 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아 상업 영화에 밀려 설 자리가 없는 단편·독립영화 감독들을 지원했다. 2011년부터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하며 가난한 영화인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단편 영화 창작 지원금을 쾌척하는 등 후학 양성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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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부터 30년 넘게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아프리카 등 빈민국 아동을 돕는 일에도 앞장섰다. 보여주기식 기부가 아니라, 실제 현장을 찾아 아이들과 뒹굴며 봉사하는 그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됐다.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은 한국영상자료원 구술 채록에서 안성기를 이렇게 정의했다. "한국 영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갈등을 중재하고, 상처를 봉합한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배우로서의 업적도 위대하지만, 인간 안성기가 영화계에 남긴 '품격'의 유산은 영원히 대체될 수 없을 것이다."
영원한 현역이자, 한국 영화의 수호천사였던 안성기.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사람의 향기'는 한국 영화 역사에 깊고 짙은 나이테로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