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현기자
김동현 교보생명 부산재무설계센터 웰스매니저
고령사회가 빠르게 심화하면서 국내에서는 '치매머니(Dementia Money)' 문제가 새로운 금융 리스크로 떠오르고 있다. 치매머니란 치매나 인지장애질환으로 계좌 입출금이 동결되거나 관리가 불가능해져 자산이 사실상 묶인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본인이 재산을 직접 관리할 수 없게 돼 금융자산의 부실관리·사기·횡령·편취 등의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과거엔 개인과 가족의 문제로만 여겨졌지만 이제는 사회적, 금융 시스템 차원에서의 구조적 문제로 논의되고 있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국내 치매환자는 약 110만명을 넘어섰다. 2030년엔 150만명, 2050년엔 300만명에 이를 전망이다. 치매로 인해 관리되지 못하는 자산 규모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금융연구원은 고령층 금융자산 중 약 154조원이 인지저하나 치매로 관리가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다고 평가한다. 일본의 경우 이미 그 규모가 2000조원에 달해 별도의 국가적 대응체계를 마련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도 같은 길을 걷게 됨을 시사한다.
문제는 숫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치매머니가 실제로 금융 피해와 가족 갈등으로 직결된다는 점이다. A씨(78세)는 초기 치매 진단을 받았음에도 투자 권유 전화에 여러 차례 노출되다 한 달 만에 3억원이 넘는 자금을 잃었다. 상품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명했고 피해가 확인됐을 때는 이미 모든 계약이 종료된 뒤였다. B씨(82세)는 통장을 맡아 관리해주겠다며 접근한 지인에게 5년 동안 7억원을 횡령당했다. 최근엔 은행 직원이 인지저하 고객의 예금을 무단 인출하거나, 방문 상담 과정에서 서류를 조작해 사적으로 자금을 유용한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고령층의 판단 능력이 약화한 틈을 타 사기, 권유 피해, 내부자 횡령이 실제로 증가하고 있음은 금융당국의 통계에서도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가족 간 갈등 역시 치매머니 문제의 중요한 요소다. 부모가 판단력을 잃은 후 재산을 누가,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둘러싼 분쟁은 대부분 발생 시점부터 해결이 어렵다. 형제 간 불신이 커지고 부모의 계좌 접근을 둘러싼 법적·도덕적 논쟁이 이어지면서 가족 자체가 해체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치매머니의 문제는 단순한 '고령층 금융 취약'의 차원을 넘어 '금융사고 증가→가족 갈등→노후 생활 붕괴'로 이어지는 연쇄적 위험을 내포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험을 어떻게 예방할 수 있을까.
최근 주목받는 해법이 신탁제도다. 신탁은 자신의 재산을 금융기관에 이전하고 그 기관이 미리 정한 지침에 따라 재산을 관리·보호해주는 구조다. 치매가 발병하기 전 건강한 시점에 미리 설정하면 이후 인지능력이 저하되더라도 재산은 안전한 시스템 안에서 운용된다.
신탁은 고령화 시대의 '행복 유지 장치'다. 자산 보유자의 생활비 지급 주기, 의료비 지출 기준, 특정 상황 발생 시 추가 지급 규칙 등을 정교하게 설계해두면 본인이 스스로 통제를 잃게 되더라도 최소한의 삶의 질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신탁은 정교한 금융관리 도구다. 자산을 직접 보유하는 것과 달리 신탁에서는 사전에 정한 규칙에 따라 자산이 운용되기 때문에 고위험 투자 권유나 사기성 제안으로부터 재산을 보호한다. 금융기관이 관리 주체가 되기 때문에 개인이 겪기 쉬운 판단 오류를 시스템적으로 차단한다.
신탁은 악의적 접근을 차단하는 보호막으로 기능한다. 지인을 가장한 사기, 내부자 횡령, 가족 간 압박 등으로부터 자산이 안전하게 격리된다. 자산 소유자의 인지능력 저하가 외부에 드러날수록 이러한 위험이 커지는데, 신탁은 이런 공격을 구조적으로 방어한다.
신탁은 가족 간 불화를 예방하는 조정 장치도 된다. 부모의 재산을 누가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의사결정권을 미리 명확히 해두기 때문에 형제 간 오해나 경쟁을 사전에 봉쇄할 수 있다. 수익자·관리자·사용조건을 명확히 규정한 신탁계약은 유산 분쟁을 예방하는 가장 강력한 장치 중 하나다.
신탁은 피해 발생 후가 아니라 '발생 전'에 작동하는 예방 시스템이다. 대부분의 치매머니 피해는 발견됐을 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신탁은 그 이전 단계에서 통제권을 시스템으로 이동시키기 때문에 금융사고 자체의 발생률을 낮춘다.
결국 치매머니 문제는 '치매가 올까 말까'의 문제가 아니라 치매가 오기 전에 어떤 시스템을 준비했는가의 문제다. 신탁은 고령화와 1인 가구 증가, 장기화하는 노년기를 고려할 때 가장 실행 가능한 관리 장치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필요한 건 단순히 금융상품을 하나 더 고르는 게 아니라 노후 자산을 안전하게 지키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다. 신탁은 그 해법이 될 수 있다. 치매머니 시대에 신탁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 대응 전략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김동현 교보생명 부산재무설계센터 웰스매니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