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배터리 산업을 둘러싼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연구개발(R&D)이나 설비투자(CAPEX) 중심이던 산업 지원 정책은 이제 '실제 생산 성과'에 따라 직접 보상하는 생산 중심 정책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기술 격차는 빠르게 좁혀지고 중국발 공급 과잉은 구조화되는 가운데, 자국 내에서 회복력 있는 생산 여건을 확보하는 것이 기업과 국가 모두에게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계기로 본격화됐다. 미국은 배터리 셀과 모듈 생산량에 연동한 첨단제조생산 세액공제(AMPC)를 도입해 자국 내 배터리 산업 생태계 구축을 가속화했다.
생산 실적에 직접 연계된 인센티브는 글로벌 기업들의 투자 판단을 바꿔 놓았고, 그 결과 미국으로 자본과 생산이 빠르게 이동했다. 이제 이 흐름은 유럽연합(EU)으로까지 확산하고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올해 5월 발표한 자동차 액션 플랜에 '배터리 부스터 프로그램'을 포함했고, 12월 16일 관련 프로그램을 공식 발표했다. 유럽 내 배터리 셀 생산시설을 대상으로 향후 2년간 18억유로를 투입해 무이자 생산시설 대출과 초기 생산 비용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이다.
더 주목할 점은 지난 5월 집행위 문건에 배터리 제조 기업에 대한 '직접 생산 지원' 검토가 명시됐다는 사실이다. 아직 회원국 간 이해 조정으로 구체화 단계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기업과 경제단체의 문제 제기를 수용해 생산 경쟁력 이슈를 EU 산업 정책의 공식 의제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EU는 그동안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나 배터리법 등 환경 규제를 통해 역내 시장을 보호해 왔다. 그러나 규제만으로는 중국의 저가 공세를 막기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생산 지원을 병행하는 실용적 접근으로 정책 방향을 조정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EU는 산업가속화법(IAA)을 통해 역내 생산 요건을 강화하는 '메이드 인 EU' 전략을 구체화할 예정이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에게 기회와 위기라는 양면성을 동시에 안긴다. 유럽에 생산 거점을 확보한 배터리 기업에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지만, 국내에서 소재와 부품을 생산해 수출해 온 중소·중견 기업들에는 투자 이전 압박과 사실상의 새로운 무역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는 국내 투자 위축과 일자리 감소, 나아가 산업 기반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정부가 검토 중인 한국형 생산촉진세제는 중요한 정책적 대안이 될 수 있다. 기획재정부가 대통령 업무보고를 통해 '국내 생산촉진세제' 도입 추진을 공식화한 것은 시의적절한 대응이다. 기업의 국내 생산량에 비례해 세액공제를 제공하는 방식은 산업계가 오랫동안 요구해 온 정책이기도 하다.
문제는 방향이 아니라 속도와 실용적인 제도 설계다. 제도 설계와 입법 과정에서 머뭇거리는 사이, 생산 라인은 보조금이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 한 번 해외로 나간 공장과 숙련 인력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미국과 EU가 자국 산업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는 상황에서 우리만 기존의 산업 지원 방식에 머문다면 이는 사실상 경쟁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국
내 생산이 기업에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되도록 제도적 환경을 근본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형 생산촉진세제가 지향해야 할 본질이다. 경제 안보 시대에 대응하기 위한 정부의 결단과 국회의 초당적 입법 지원이 절실하다. 골든타임은 길지 않다.
박태성 한국배터리산업협회 상근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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