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행정법원이 반도체 공장에서 장기간 근무한 뒤 골수형성이상증후군(MDS)으로 사망한 근로자에 대해 유족급여와 장의비 지급을 거부한 근로복지공단의 처분을 취소했다. 법원은 고인의 사망과 업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재판장 최수진 부장판사)는 최근 고인의 배우자 A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 취소소송(2022구합70544)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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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근무하며 디클로로메탄(발암 추정물질)을 사용한 이력이 있고, 이후에도 불산 등 각종 유해산에 반복적으로 노출됐다. 작업장은 환기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으며, 일반 마스크와 라텍스 장갑 외엔 별다른 보호장비도 지급되지 않았다. 특히 주 60시간 이상 주·야간 교대근무를 장기간 이어오며 면역력이 현저히 저하된 상태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고인은 2017년 골수형성이상증후군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다가, 이듬해 폐렴으로 사망했다. 사망진단서에는 직접 사인으로 폐렴이, 선행 질환으로 MDS가 기재돼 있었다. 이에 A 씨는 산업재해로 인한 유족급여 및 장의비를 청구했지만, 근로복지공단은 "유해물질 노출 수준이 낮고, 의학적 인과관계가 불명확하다"며 지급을 거부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공단의 판단이 부당하다고 봤다. 재판부는 "망인은 유해화학물질로부터 신체를 보호할 만한 보호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환경에서 작업환경측정결과상 측정된 유해인자의 노출값보다 더 높은 수준 또는 유해인자 외에 다양한 유해화학물질에 장기간 노출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또한 재판부는 "유해인자 노출 기준은 유해인자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경우를 전제로 한 것인데, 여러 유해인자에 복합적으로 노출되거나 평균 근로시간 이상으로 장시간 근무하거나 작업강도가 높거나 주·야간 교대근무를 하는 등 작업환경의 유해요소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경우 등에는 유해 요소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질병 발생의 위험이 커질 수 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특히 "망인은 이 사건 사업장에서 1주 평균 약 60시간, 주 6일 주·야간 교대근무를 하였고, 주·야간 교대근무로 인한 만성피로 등의 증상과 스트레스 관련 증상을 호소하였으며, 이에 대해 주치의의 개인적 소견으로 직업 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혈당 조절이나 스트레스 관련 증상 호전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며 "주·야간 교대근무는 취침시간 불규칙, 수면부족, 생활리듬 및 생체리듬의 혼란으로 암 성장 억제 효과를 가진 호르몬이 교란될 가능성이 있어 그 자체로 질병을 촉발하거나 신체 면역력을 저하시켜 질병 발생 및 악화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져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누적된 장시간 근무와 주·야간 교대근무로 인하여 신체 항상성이 취약하고 면역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디클로로메탄을 포함한 다양한 유해화학물질, 극저주파자기장 등과 같은 유해요소에 지속적·복합적으로 노출된 것이 망인의 신체에 악영향을 주어 이 사건 상병의 발병이나 악화에 작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망인은 최초 입사 전 건강에 별다른 이상이 없었고, 이 사건 상병과 관련된 유전적 소인, 병력, 가족력이 없는데도, 우리나라의 평균 발병연령(60~70세)보다 훨씬 이른 만 44세 무렵에 이 사건 상병으로 진단받고 사망하였는바, 위와 같은 업무환경이 망인의 이 사건 상병의 발병 및 악화에 기여하였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며 작업과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안재명 법률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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