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강나훔기자
주요국 통상수장들이 모이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통상장관회의가 15일부터 이틀간 제주 서귀포시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에서 열린다. 21개 회원국 통상장관과 국제기구 고위급 인사들이 대거 참석하는 이번 다자회의를 계기로 글로벌 통상질서 재편을 둘러싼 치열한 물밑 조율이 예상된다.
15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안덕근 산업부 장관과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오는 16일 별도로 만나 관세·비관세 분야 협상의 중간 점검에 나선다. 이는 지난달 워싱턴DC에서 열린 '2+2 통상협의' 이후 3주 만에 성사된 후속 대면 협상으로, 7월 8일 타결을 목표로 추진 중인 '7월 패키지' 협상의 성패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한국은 이번 회담에서 조선, 에너지 등 산업 협력 방안을 제시하며, 자동차·반도체 등 주요 품목에 대한 미국의 관세 인하를 이끌어내기 위해 협상력을 집중할 계획이다. 특히 최근 미국이 중국과 전격적으로 관세 인하 합의를 이끌어낸 이후, 한국에 대해서도 일정 수준의 유연성을 보일지 주목된다. 산업부 관계자는 "줄라이 패키지 협상 가속화를 위해 안 장관이 직접 나서는 만큼, 상당한 진전이 기대된다"고 전했다.
한미 협상은 단순한 양국 간 통상 이슈를 넘어,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변화하는 글로벌 통상 환경 속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를 가늠하는 중대 시험대다. 최근 미국은 영국, 중국 등과 연이어 무역 합의를 도출하며 '관세 전쟁' 국면에서 일정 부분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번 한미 회담 결과에 따라 한국의 대미 통상 전략도 크게 조정될 수 있다.
정인교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15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에서 열린 ‘2025 APEC 통상장관회의’ 참석을 계기로 방문한 리청강 중국 상무부 국제무역협상대표 겸 부부장과 양자 면담을 갖고, 한·중 FTA 서비스·투자 협상 등 양국 간 통상·경제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산업통상자원부 제공
APEC 회의장 밖에서도 주요국 간 물밑 협상이 활발히 이뤄질 전망이다. 미국과 중국은 최근 제네바 고위급 협상을 통해 상호 관세를 각각 115%포인트 인하하는 데 합의했으며, 이번 제주 회의에서도 제이미슨 그리어 대표와 리청강 중국 상무부 국제무역담판대표 겸 부부장이 추가 협의를 이어갈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과 일본 간 양자회담 여부도 관심을 모으고 있으나, 구체적인 일정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산업부 관계자는 "참가국 면면이나 양자회담 일정은 매우 민감한 사안이라 실시간으로 변동 가능성이 있다"며 "오늘(15일) 다자회의를 계기로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회의는 오는 10월 말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통상 분야 의제를 조율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회의 결과에 따라 한국의 수출산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관세 인하 여부와 중장기적인 통상 전략의 방향성이 결정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 세계가 보호무역과 무역 갈등의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 가운데, 제주에서 시작되는 양자·다자 협상의 흐름이 향후 글로벌 경제에 적지 않은 파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우리 정부는 이번 회의 주제를 ▲무역원활화를 위한 AI 혁신 ▲다자무역체제를 통한 연결 ▲지속가능한 무역을 통한 번영 등 3개 세션으로 구성했다.
먼저 '무역 원활화를 위한 AI 혁신' 세션에서는 통상 분야에서 AI 활용을 촉진하기 위한 다양한 협력 방안을 논의한다. 관세·통관 행정에서의 AI 활용, AI 표준 정보 등에 대한 의견을 공유한다. 이 세션에서는 AI 원칙(OECD Principles on AI) 제정 등 AI 국제 통상 규범화 작업에 선도적 역할을 해온 요시키 타케우치 OECD의 사무차장이 발제한다.
'다자무역체제를 통한 연결' 세션에서는 WTO의 혁신 방안과 다자무역체제 회복을 위한 APEC의 역할 등에 대해 논의를 진행한다. '지속가능한 무역을 통한 번영' 세션에서는 안정적인 공급망 뿐만 아니라 기후 위기 대응 등 지속가능한 공급망 구축을 위한 공조 방안에 대한 논의가 있을 예정이다.
정인교 통상교섭본부장은 "APEC을 둘러싼 대외 환경이 녹록지 않으며 엄중한 글로벌 통상 환경을 고려했을 때, 그 어느때보다 APEC의 역할이 필요한 상황이며 다자무역체제가 시험대에 오른 오늘날 본 회의 논의 결과가 세계에 큰 울림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오늘 통상장관회의가 세계가 당면한 정치적, 경제적 갈등과 불확실성 해소에 도움이 되는 소통과 협력의 플랫폼이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