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윤기자
인공지능(AI) 시대가 도래하면서 혁신 기술을 발 빠르게 사업화한 기업들은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대처가 늦은 기업들은 순식간에 역사의 뒤편으로 밀려나고 있다.
옆 나라 일본은 장인 정신과 전통 고수 문화로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한때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던 TV·가전 기업 샤프(Sharp)는 이미 폭스콘에 인수되었고, 자동차 산업을 이끌던 도요타·혼다 역시 자율주행·AI 소프트웨어 경쟁에서 뒤처져 중국 바이두 등 경쟁사의 성장에 밀린다는 평가다.
반면 국내에서는 과거 디지털 시대로 전환되던 시기에 기민하게 대응해 성장한 기업이 삼성전자다. 이건희 회장의 "불확실한 미래일수록, 미래 기술에 투자해야 한다"는 철학 아래 대규모 연구개발(R&D) 인력 채용과 해외 우수 인재 영입을 통해 연구소를 지속적으로 운영했다.
당장 수익이 나지 않아도 기술적 역량을 꾸준히 쌓은 덕분에, 최근에는 차세대 모바일 보안 기술인 양자 내성 암호(Post-Quantum Cryptography, PQC)를 갤럭시 S25 시리즈에 업계 최초로 탑재하며 양자 컴퓨팅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이는 연구소가 다양한 가능성을 미리 모색하고 실용화 경험을 축적해두면 시장이 본격적으로 기술을 요구할 때 신속하게 사업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나 최근 삼성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의 'p 발음 금지' 공문 같은 지엽적인 이슈들은 본질적인 혁신보다 내부 절차와 보고 체계에만 매달리고 있음을 드러낸다. "서초 보고"라 불리는 사업지원 태스크포스(일명 'HH')가 아이디어 검토를 좌우하다 보니 조직이 민첩하고 유연해야 할 시점에도 새로운 시도가 막힌다는 평가다.
연구소와 삼성SDS마저 이러한 문화를 강요받아 단기 성과에만 집중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실패를 통한 학습과 도전 정신이 사라지고 실패하지 않기 위한 쉬운 프로젝트만 운영되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다.
사업부가 당장의 매출과 이익 창출에 집중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연구소의 본질은 미래에 대비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실패를 '밥 먹듯이' 겪으면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데 있다.
대표적 사례로 바이오 분야의 선두주자 이스라엘 바이츠만연구소는 매년 특허 중 25% 이상을 사업화에 성공하며 블록버스터 신약만 5개가 넘는다. 이 모든 성공은 '무제한적인 연구 자율성'에서 비롯되는데 연구자들이 단기 연구 과제가 아닌 평생 몰두할 과제를 탐색하며 폭넓은 재량권을 보장받는다.
성과 중심 기업인 구글도 연구원들에게만큼은 높은 자율권을 보장한다. 방대한 인력을 투입해 AI 연구와 논문을 자유롭게 작성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했기에 'Transformer'와 같은 핵심 기술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연구원 채용 시 성과 중심보다는 미래기술 연구를 위한 자율성을 제공하고, 현업 제품팀과의 협력을 통해 실용화까지 이어지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음성인식, 컴퓨터 비전, 자연어처리 등 핵심 AI 분야에서 연구소의 성과가 '오피스(Office)' '빙(Bing)' 등 실제 서비스에 적용된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창의적이고 뛰어난 두뇌의 인재들은 연구소에 배치해 자유롭게 목장에서 뛰노는 양처럼 만들어줘야 하고, 빠르고 현실적인 인재들은 사업부에 두어 성과 중심의 확실한 보상으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삼성이 디지털 전환 시대를 성공적으로 돌파했듯이, AI가 주도하는 격변기에도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우뚝 서려면 본질을 보는 힘과 끊임없는 혁신 의지가 필수다.
연구소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우수 인재 확보를 멈추지 않으면서, 사업부와 연구소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하고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실패를 밥 먹듯이 하면서도 미래를 준비하는 기업만이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다.
경나경 싱가포르국립대 컴퓨터과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