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선기자
'주권매매거래정지' 일반투자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한국거래소의 공시는 거래정지다. 기업 경영진이 고소·고발 또는 검찰의 공소 제기로 횡령 및 배임 사실이 드러나면 해당 종목의 거래는 곧바로 중단되고, 한국거래소는 상장폐지 여부를 심사한다. 주식거래를 멈춰야 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란 의미다. 하지만 기업 내부를 향한 범죄, 횡령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1일 아시아경제가 더불어민주당 김남근 의원실을 통해 전달받은 한국거래소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자본시장에서 횡령 및 배임이 발생했다고 공시한 기업은 29개사, 4025억원이었다. 유가증권·코스닥·코넥스 시장에서 각각 1481억원, 2303억원, 241억원의 횡령 및 배임이 발생했다. 29개 상장사 가운데 16개는 현재 주식 거래가 정지된 상태다.
상장사 횡령·배임 사건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횡령 및 배임 발생액은 2022년 3471억원, 2023년 4069억원으로 최근 3년간 누적액이 1조1500억원이 넘는다. 올해 1월1일부터 2월11일까지의 횡령 및 배임 발생액은 637억원으로 이 추세대로라면 지난해와 비슷하거나 더 많은 수준이 될 수 있다. 횡령 및 배임 혐의 관련 공시 건수도 2022년 23건에서 2023년 41건, 지난해 49건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상장사들은 엄청난 횡령 액수를 공시하기도 했다. 코넥스 상장사인 셀젠텍은 지난해 7월4일 240억6794만원에 달하는 횡령이 발생했다고 공시했다. 자기자본 약 107억원의 두 배를 넘어서는 액수다. 거래소는 공시가 나오자 셀젠텍의 거래를 막았다. 이후 셀젠텍은 약 한 달 만에 상장폐지돼 정리매매 절차를 밟았다. 코스닥 상장사 한국유니온제약은 지난해 10월11일 194억4450만원가량의 횡령 및 배임이 발생했다고 처음 공시한 이후 13차례나 횡령·배임 혐의 발생을 알렸다. 액수를 모두 합치면 260억4881만원이다.
상장적격성 실질심사 사유가 발생한 경우 한국거래소는 해당 종목에 대한 거래를 중단시킬 수 있다. 코스닥시장 상장 규정에 따르면 횡령 및 배임 규모가 자기자본의 5%(대기업은 3%) 이상, 임원의 경우 자기자본의 3% 또는 10억원 이상이면 상장적격성 실질심사 사유에 해당한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해 횡령 등 배임으로 상장적격성 실질심사 사유가 발생해 거래정지 된 종목은 총 17개다. 2022년 12개, 2023년 20개 등 매년 횡령 및 배임으로 거래정지 되는 종목이 생겼다.
횡령 및 배임으로 거래정지 된 상장사의 '끝'은 좋지 않다. 심각한 경우, 횡령 및 배임에 연루된 해당 종목은 실질심사 끝에 상장폐지 될 수 있다. 한순간에 소액주주의 돈이 날아갈 수 있다는 의미다.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2022~2023년 횡령 및 배임 혐의가 발생했다고 공시한 43개 기업 가운데 9개 기업은 현재 상장폐지 된 상태다. 코스닥 상장사였던 티엘아이는 2023년 3월 창업주 김달수 전 대표의 배임 혐의로 인해 거래정지 됐다. 이후 티엘아이는 이의신청서를 제출하고 개선기간을 부여받았지만 지난해 11월 결국 상장폐지 됐다.
횡령 및 배임에 대한 처벌이 약해 관련 범죄가 이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2009년에 시행된 횡령 및 배임의 양형 기준은 큰 변화 없이 15년 넘게 유지하고 있다. 오스템임플란트의 2215억원 횡령 사건, BNK경남은행의 3089억원 횡령 사건 등 몇천억 원대 횡령 사건이 매년 벌어지고 있는데 최대 형량의 기준이 되는 횡령 및 배임 액수는 300억원이다.
처벌 수위도 해외 선진국과 비교할 때 현저하게 낮다. 한국에서는 300억원 이상의 횡령 범죄를 저지르면서 대량의 피해자를 낳아 가중처벌 대상이 돼도 최대 형량이 11년이다. 감경 사유가 있으면 수천억 원을 횡령해도 징역 4~7년형에서 처벌이 끝난다.
미국의 경우 형벌 기준을 43단계로 나누는데 횡령은 7단계부터 시작한다. 횡령 액수, 피해자 수, 범행 수법, 전과 유무 등을 고려해 단계가 올라가는데, 금융업 종사자 등 특정 직업군에 따라 더 강한 처벌을 하기도 한다. 은행원이 횡령 범죄를 저지르면 연방법상 특정 범죄로 분류돼 최장 30년까지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버나드 메이도프 전 나스닥증권거래소 위원장은 2009년 650억달러 규모의 금융사기와 직원연금 횡령 등 혐의로 징역 150년을 받고 옥중에서 사망했다.
이상호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과거 양형 기준을 만들 때는 1000억원대 범죄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상황이 많이 변했다"며 "미국은 횡령 및 배임 범죄의 양형 기준을 횡령 액수별로 세분화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도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