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현기자
올해 사상 최대 실적을 쏟아낸 국내 보험사들이 외국인 투자자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다. 탄핵정국과 고환율 여파도 있지만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보험회계의 불확실성을 가장 큰 투자 불안요인으로 꼽는다. 금융당국의 잦은 회계기준 변경에 정부의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정책도 무색해지고 있다.
24일 아시아경제가 무·저해지 보험 해지율 가정 가이드라인 등 최근 금융당국의 보험회계 개선안 발표 전후로 국내 상장 보험사에 대한 투자 현황을 분석한 결과 외국인 투자자 이탈이 두드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가이드라인이 발표된 지난달 7일부터 이달 20일까지 32거래일간 국내 코스피 상장 보험사 11곳의 주가는 평균 5.46% 하락했다. 이 기간 외국인은 보험사 주식(우선주 포함 13개 종목) 1622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이들 보험사 주가는 가이드라인 발표 전 32거래일 동안엔 1.78% 상승했다. 이 기간 코스피가 0.46% 내리는 동안에도 외국인이 보험사 주식 약 1993억원을 순매수하며 지수를 방어했다. 올해 보험사가 역대 최대치 실적을 찍고 있고 연말에 보험사 주식이 배당주로서의 매력도 커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최근 외국인 투자자 이탈은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국내 한 보험사 기업설명(IR) 담당자는 "최근 해외 유명 투자은행(IB)에서 잦은 회계기준 변화에 따른 실적 변동 가능성에 대해 문의해오는 경우가 많다"면서 "이익지표 일부가 바뀔 수 있다고 설명해주면 다들 이런 건 처음 본다는 반응"이라고 전했다.
국내 상장 보험사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의 불안심리가 단적으로 드러났던 때가 지난 20일이다. 이날 현대해상은 배당이 어렵다는 증권가 전망에 52주 신저가를 경신했다. 주가가 장중 9.6% 급락하기도 했다. 외국인은 이날 하루에만 현대해상 주식 19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이달 들어 일별 외국인 순매도 규모로는 두 번째로 컸다. 이병건 DB금융투자 리서치센터장은 "현재의 회계 관련 제도 개정 방향성에 큰 변화가 없으면 현대해상은 내년 이후에도 2~3년간 배당 재개가 어려울 것"이라며 "금리 상승이나 실손보험료 인상 등 최소 한 가지 이상의 개선조치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간 1조원 안팎의 당기순이익을 벌어온 현대해상이 22년간 해왔던 배당을 갑자기 못할 처지에 놓이게 된 건 새 국제회계기준(IFRS17) 도입에 따른 회계제도 변화가 주요 원인이다. 대표적인 게 해약환급금준비금 제도다. 이는 보험사가 보험계약 해지 등에 대비해 쌓는 돈으로 IFRS17 시행 당시 도입됐다. IFRS17 도입으로 보험부채가 시가평가로 바뀌면서 부채가 줄고 해약환급금이 부족해질 가능성이 생기자 금융당국이 돈을 보수적으로 쌓도록 한 조치다. 이는 배당가능 이익에서 제외된다.
문제는 이 제도가 지나치게 보험사의 자본을 묶어 둔다는 점이다. 올해 상반기 국내 보험사의 해약환급금준비금 누적액은 38조5000억원으로 지난해 말(32조2000억원)과 비교해 19.6% 증가했다. IFRS17이 시행되기 전인 2022년 말(23조70000억원)과 비교해 62.4% 급증했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해약환급금준비금은 IFRS17 도입으로 보험사 자본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자 이를 다른 곳에 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라며 "보험계약자 보호 등 제도 도입 취지는 이해하지만 수조 원을 벌어도 배당을 할 수 없게 되는 건 큰 문제"라고 설명했다.
보험사 해약환급금준비금 증가는 배당 감소뿐 아니라 법인세 감소도 불러왔다. 보험사들은 2022년 3조4000억원의 법인세를 냈지만 지난해엔 8000억원에 그쳤다. 이는 해약환급금준비금이 법인세법상 손금으로 인정돼 세금 납부가 일정 기간 이연됐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은 보험사 실적이 역대 최대치를 찍고 있는데 법인세는 줄어드는 문제가 생기자 지난 10월 해약환급금준비금 개선책을 발표했다. 보험사 재무건전성 지표인 지급여력비율(K-ICS·킥스)이 200%(경과조치 전 기준)를 넘으면 올해는 기존 준비금의 80%만 적립하도록 했다. 하지만 상장 보험사 중 킥스가 200%를 넘는 곳은 상반기 기준 삼성생명·삼성화재·DB손해보험 등 3곳뿐이다. 현대해상(169.7%), 한화생명(162.8%), 한화손해보험(171.7%) 등 대부분이 이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당국의 졸속 회계정책으로 배당에 세수까지 줄어드는 결과가 초래된 것"이라며 "매번 규제완화 관련 우대가 킥스 150%였는데 이번엔 200%를 맞추라고 한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상장 보험사들은 꾸준히 해오던 배당을 갑자기 중단하면 투자자들로부터 크게 신뢰를 잃을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킥스를 맞추려 노력하고 있다. 배당 가능성이 불투명해진 한화생명은 지난 12일 8000억원 규모의 후순위채를 발행했다. 한화생명은 올해 들어서만 1조9000억원에 달하는 자본성 증권을 발행했는데 모두 하반기에 집중됐다. 지난 8월엔 한화손해보험이 3500억원, 10월엔 동양생명이 3000억원 규모의 후순위채 발행에 나서는 등 최근 상장 보험사들의 자본 확충 행렬이 잇따르고 있다. 역대 최대 실적을 냈어도 이자를 내가며 돈을 빌리러 다녀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올해 연말 회계 결산부터 적용되는 무·저해지 보험 해지율 가이드라인도 배당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보고 있다. 당국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서 보험사들에 보수적 가정이 반영된 '원칙모형'을 강요했다. 보험사 자체 통계에 기반한 가정을 적용하는 '예외모형'을 쓸 경우 금감원의 까다로운 검사를 받도록 했다. 정태준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예상 배당수익률에 영향을 주는 가장 큰 변수는 무·저해지 보험 해지율 가정 변경에 따른 보험계약마진(CSM) 감소"라며 "주로 2위권 기업이 영향을 크게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