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수기자
비상계엄 사태로 인한 정국 불안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면서 내년 초 자금조달을 앞둔 기업들도 노심초사하는 분위기다. 내년 1분기에 약 27조원의 회사채 만기가 도래해 회사채 발행 수요가 3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의 발 빠른 대응으로 금리 변동성이 커지지는 않고 있지만, 불안한 상황이 장기화하면 내년 기업들의 자금 확보 계획이 순탄치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1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비상계엄 이후 환율이 급등하고 주식시장이 폭락하는 가운데서도 채권 금리는 안정적인 흐름을 보이고 있다. 국고채 금리는 2% 중반 수준에서 움직이고 있고, 국가의 부도 위험을 수치로 나타낸 크레디트디폴트스와프(CDS) 프리미엄도 비상계엄 이후 35~37bp(1bp=0.01%) 수준에서 큰 폭의 변동성을 보이지 않았다.
채권시장 관계자는 "사태 직후 정부가 증권시장안정펀드(증안펀드)와 채권시장안정펀드(채안펀드) 등의 시장 안정대책을 발표하면서 주식시장이 폭락한 것과는 달리 채권 시장은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비상계엄 사태로 인한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증안펀드 10조원, 채안펀드 40조원, 채권 및 기업어음(CP) 매입 프로그램, 증권금융에 대한 외화유동성 공급 등의 시장안정 조치가 적기에 시행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비상계엄 이후의 정국 불안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면서 내년 초 경영계획대로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기업들의 우려는 커지고 있다. 국내 대기업들은 내년 1분기에 약 27조원 규모의 회사채 만기를 맞는다. 만기 회사채의 상당 부분을 재발행(차환)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신규 자금 수요를 더해 1분기에만 30조원 이상의 회사채를 발행할 예정인 것으로 추산된다.
연중 기업들의 채권 발행량의 가장 많은 1월 한달동안에만 약 8조7000억원어치의 회사채 만기가 대기하고 있다. KT(AAA, 700억원), 한국남부발전(AAA, 400억원), 포스코(AA+, 500억원), 이마트(AA-, 700억원), LG유플러스(AA, 1200억원), SK텔레콤(AAA, 1300억원), 대상(AA-, 700억원), 현대제철(AA, 600억원) 등 AA급 이상 우량 기업들이 줄줄이 회사채 만기에 대응해야 한다.
A급 이하 비우량 기업 중에서도 한진칼(BBB, 100억원), LG디스플레이(A, 620억원), 현대로템(A, 700억원), CJ프레시웨이(A, 1000억원), 한진(BBB+, 560억원), 대한항공(A-, 1360억원), 하이트진로홀딩스(A, 500억원) 등이 발행한 회사채가 오는 1월 만기 도래한다.
비우량 등급 채권의 경우 금리 변동성에 다소 취약하다는 약점을 갖고 있다. 자금시장 관계자는 "비상계엄 이후의 정국 불안이 탄핵 의결 불발로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면서 "이 경우 점차 투자자들의 불안 심리가 강화되면서 채권 금리가 오르고 비우량 기업들이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 농단으로 탄핵 목소리가 컸던 2016년 10월 이후 회사채 신용 스프레드는 전반적으로 확대됐다. 사태 발발 지적인 2016년 9월말 평균 35bp를 기록하던 3년만기 AA-등급 회사채 스프레드는 3개월 후인 12월에 54bp까지 확대됐다. A급 이하의 비우량 채권 스프레드는 확대 폭이 더 컸다.
채권 시장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당시는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던 시기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인상 기조와 맞물리면서 전반적으로 금리가 상승하는 추세였다"고 회고했다. 이 관계자는 "지금이 당시와 같은 상황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불안이 장기화하면 시장의 리스크가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면 당시 탄핵 표결부터 실제 탄핵일까지는 신용 스프레드가 축소되는 경향을 보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박 전 대통령 탄핵 전후 회사채 신용스프레드는 52.6bp에서 52.5bp로 보합권을 나타냈다. 이듬해 3월 헌법재판스의 탄핵 선고일까지 회사채 스프레드가 계속 축소되는 양상을 보였다.
IB업계 관계자는 "과거의 정치적 불안이 금리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환율 상승이나 수급 상황 등에 따라 이번 사태가 금리나 시장 유동성에 미치는 악영향이 커질 수 있다"고 걱정했다. 이 관계자는 "기업들이 회사채 발행 일정을 분산하거나 뒤로 미루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