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순경]24시간 범인 흔적 쫓는 '등대'…과학수사팀 근무일지

변사·화재·무전취식 현장 출동
사건 실마리 푸는 단서 제공

편집자주Z세대가 온다. 20·30 신입들이 조직 문화의 미래를 결정하는 시대다. 경찰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경찰에는 형사, 수사, 경비, 정보, 교통, 경무, 홍보, 청문, 여성·청소년 등 다양한 부서가 있다. 시도청, 경찰서, 기동대, 지구대·파출소 등 근무환경이 다르고 지역마다 하는 일은 천차만별이다. 막내 경찰관의 시선에서 자신의 부서를 소개하고, 그들이 생각하는 일과 삶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지난 3일 찾은 서울 강서경찰서. 경찰서 내부에 마련된 실험실 한쪽에서 이하늘 순경(31)이 브러시를 든 채 소주병을 쓸기 시작했다. 브러시가 유리 표면 위에 미세한 분말을 남기며 미끄러졌다. 작업을 마친 이 순경이 푸른빛이 도는 광원으로 소주병을 비추며 표면을 응시했다. 실험대 위에 놓인 소주병은 무전취식 신고가 접수된 음식점에서 습득한 증거물이다. 맨눈으로는 별다른 특이점을 찾을 수 없지만 과학수사 기법을 이용하면 지문을 찾아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증거를 찾아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는 일. 이 순경이 과학수사에 큰 매력을 느낀 이유다.

현대 기술의 발전으로 범죄 수법도 지능화되면서 과학수사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현장의 증거 확보 능력은 곧 수사 성과를 좌우한다. 이에 따라 서울경찰청은 권역별로 3곳의 경찰서를 묶어 서울 시내에 총 9개의 광역과학수사팀을 운영하고 있다. 이 중 광역과학수사 8팀은 강서·구로·양천구 일대서 활약하고 있다. 이 지역은 다른 곳에 비해 노인 인구가 많아 변사 사건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그만큼 중압감도 상당하다. 현장에 남은 증거를 쫓아 고군분투하는 과학수사팀 현장 감식 요원, 이 순경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난 3일 이하늘 순경이 서울 양천구 서울경찰청 광역과학수사팀 청사 내 실험실에 지문 감식을 하고 있다. 이지은 기자.

지문 감식 실습에 매혹… 전문 지식 쌓으며 입직 준비

2021년 특채로 선발돼 입직한 이 순경은 8개월간의 실습을 거친 뒤 이듬해 2월부터 광역과학수사 8팀에 배치됐다. 현장 감식 업무를 맡은 지는 햇수로 3년 차지만 전문 지식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대학원에서 법과학 석사 과정을 밟으며 과학수사 기법에 대한 이론적 지식을 탄탄히 쌓아왔기 때문이다.

이 순경은 대학 시절 접한 실습수업이 자신을 과학수사대원의 길로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강의 도중 법과학 대학원 출신 조교가 지문을 감식하는 모습을 학생들 앞에서 시연했다"며 "시약을 뿌리자 보이지 않던 지문이 노출됐는데 그 순간 과학수사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됐다"고 회상했다.

실제로 어떻게 지문이 보이게 되는지 설명해 주겠다며 그가 실험실 한쪽의 종이를 꺼내 들었다. 손자국이 찍힌 종이 위에 시약을 쏟아부은 뒤 달궈진 다리미를 종이 위에 올려두었다. 열처리를 시작하자 종이 위로 푸른 빛을 띤 지문이 노출됐다. 이렇게 채취된 지문들은 카메라로 촬영한 뒤 지문감식시스템에 입력한다. 상태가 온전한 지문일 경우 신원 일치 여부를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쪽지문이나 특징점을 찾기 어려운 지문은 인식에 어려움을 겪는다.

3일 이하늘 순경이 서울 양천구 서울경찰청 광역과학수사팀 청사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 하고 있다. 이지은 기자.

그러나 이 순경의 일과는 단순 증거물을 분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현장 출동을 시작으로 보고서 작성까지 1개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업무를 마쳐야 한다. 더욱이 한 팀이 3교대로 돌아가며 근무하는 체제다 보니 근무일에는 24시간 내내 일터에서 보낸다.

이 순경은 "오전 8시 출근해 업무 차량을 청소한 뒤 강서경찰서로 향한다"며 "전일 근무에서 작성한 현장 감식 보고서를 검토하고 결재를 올린 뒤에는 경찰청으로부터 도착한 감정 결과서를 살펴본다"고 설명했다. 업무 도중 사건 사고가 접수되면 즉시 현장으로 출동하는 것도 이 순경의 몫이다.

화재·변사 현장 고되지만…작은 증거도 꼼꼼히

사건 현장에서의 업무 강도도 만만치 않다. 이 순경은 무전취식과 절도, 변사 등 하루 평균 5건 안팎의 사건 현장에 출동한다. 현장에서는 강도 높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아무리 작은 증거라 할지라도 추후 사건의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이 순경은 가장 어려운 현장으로 변사와 화재 사건을 꼽았다. 그는 "많을 때는 24시간 동안 변사 사건 현장을 하루에 10번 간 적도 있다"며 "특히 영아 변사가 발생했을 때는 심적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화재 현장은 불이 난 패턴과 물체의 어느 부위가 중점적으로 탔는지를 보며 발화 근원지를 찾아내야 해 현장 감식 난도가 높다"고 말했다.

3일 이하늘 순경이 서울경찰청 광역과학수사팀 청사에서 지문감식시스템을 이용하고 있다. 이지은 기자.

고된 업무 속에 뜻밖의 보람찬 순간들도 찾아온다. 사건 해결을 위한 결정적 증거를 발견할 때다. 이 순경은 "마약 사건과 관련해 피의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있지만 물적 증거가 부족해 어려움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며 "감정물에서 DNA를 채취하는 데 성공하면서 사건 해결에 큰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감정물에서 범인의 흔적이 발견될 때도 뿌듯함이 배가 된다. 이 순경은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쓰레기를 가져와 분석했는데 이미 다른 사건으로 구속됐던 피의자의 DNA가 나온 적이 있었다"며 "여기서 설마 DNA가 나올까 싶은 것도 절대 간과하지 않고 분석을 해보려 한다"고 말했다.

운동과 진로 특강…긍정적 에너지로 스트레스 타파

물론 이 순경에도 힘겨운 시기는 찾아온다. 변사 등 외상 사건을 수시로 접하는 과학수사 특성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는 늘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그럴 때마다 그는 운동과 여행으로 스트레스를 풀어나간다. 이 순경은 "이전에는 헬스 트레이닝을 했고 최근에는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체력을 단련해 건강한 몸과 마음을 만들려 한다"며 "또 국내 여행을 자주 떠나며 마음을 환기하고 새로운 기분으로 다시 출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이들로부터 얻는 순수한 열정도 큰 동기부여가 된다. 이 순경은 휴일마다 국공립 초·중·고등학교에서 진로 체험 특강을 나간다. 그는 "청소년들이 과학수사에 가진 호기심과 관심이 상당하다"며 "멋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더 잘해야겠다는 의욕이 샘솟는다"고 했다.

3일 이하늘 순경이 서울경찰청 광역과학수사팀 청사에서 인터뷰 중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지은 기자.

함께하는 동료와 선배들도 이 순경에는 든든한 지원군 같은 존재다. 이 순경은 "사건이 많다 보면 체력적으로 힘들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반장님이 재미있는 이야기와 감식 노하우를 전수해준다"며 "현장에서 특정 사건은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같이 고민해 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 순경은 과학수사대원을 한마디로 표현해 달라는 질문에 '등대'라는 답을 내놨다. 암흑 속에서 망망대해를 헤매던 배는 등대의 불빛으로 길을 찾는다. 과학수사도 마찬가지다. 현장 감식 요원이 찾는 증거가 의문투성이던 사건에 한줄기 해답을 내려준다. 이 순경은 "등대는 뒤에서 묵묵히 불빛을 비춰주는 존재"라며 "광역과학수사팀 역시 사건이 실체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부서"라고 말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사회부 이지은 기자 jelee0429@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오늘의 주요 뉴스

헤드라인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