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채석기자
"퀄컴 스냅드래곤에도 그 기술이 들어 있어? 퀄컴이 안 하는데 우리(삼성전자)가 왜 해야 해?"
삼성전자 갤럭시 휴대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엑시노스' 개발 조직에서 10년간 일한 후 삼성을 떠난 협력사 개발 리더 A씨는 삼성 반도체에 대해 "혁신이 죽었다"고 평가했다. A씨는 삼성을 떠나 협력사로 옮긴 후 외부 기술 가치를 인정하는 데 인색하고 과감한 투자와 협력을 주저하는 삼성의 문제점을 더 명확히 느꼈다고 밝혔다. 그는 삼성전자가 다시 강해지려면 보신주의와 부서 칸막이 문화를 타파해야 한다고 진심 어린 조언을 내놨다.
인터뷰를 익명으로 요구한 A씨는 삼성 반도체가 ▲외부 기술 가치를 저평가하며 ▲외부 업체 및 전직 삼성 출신 인재와의 협업에 소극적이라고 했다. 그는 "인재가 삼성을 떠나 협력사를 창업하면 상생 경영을 통해 이들의 기술과 제품이 삼성의 공급망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유도해야 하지만 그런 사례가 드물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인 사례로 인공지능(AI)용 신경망처리장치(NPU) 전문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 기업 퓨리오사AI가 삼성 대신 KT로부터 투자를 유치한 일을 들었다. 퓨리오사AI 창업자인 백준호 대표는 삼성 반도체(DS)부문 메모리사업부 설계팀 출신이다.
A씨는 "과거에는 팹리스 분야에서도 삼성이 모든 것을 자체적으로 처리해 다른 업체들이 사업하기 어렵다고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며 "여러 분야에 (삼성을 떠난) 인재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삼성은 외부 업체와의 공동 개발, 투자, 인수는 물론 전직 삼성 출신 인재들과의 협업에도 소극적"이라고 꼬집었다.
A씨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삼성 반도체 조직 문화를 크게 '실패를 두려워하는 보신주의'와 '부서 간 칸막이 현상'으로 꼽았다. 그는 직원이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제안해도 임원 의사결정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며 "계급장을 떼고 자유롭게 토론해 최선의 아이디어를 적용하는 사례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부서 간 협업도 쉽지 않다. 그는 삼성 재직 당시 삼성벤처투자가 미국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 계획을 추진했으나 기획팀의 반대로 무산된 경험을 전했다. 당시 DS부문 내 사업부장(사장급)이 "투자와 인수를 적극 검토해 보자"라고 제안했으나 기획팀의 만류로 무산됐다고 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사업부 임원들은 점점 도전적인 투자를 꺼리게 됐다고 한다.
반면 경쟁사인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는 지나치게 의식한다고 했다. 2015년 글로벌 모바일 AP 시장이 32비트에서 64비트로 전환되던 시기에 삼성은 32비트와 64비트 제품 개발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처음엔 32비트 제품을 개발하다가 퀄컴이 64비트 제품을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64비트로 전환했다는 것이다. A씨는 "삼성은 경쟁사의 동향을 유심히 살펴보고 남들이 하면 따라가되 적은 인력으로 높은 효율을 내는 '패스트 팔로어' 전략을 택해왔다"며 이는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조직 문화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삼성 반도체가 앞으로 50년간 생존하려면 'AI 퍼스트 무버(개척자)'가 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를 위해선 보신주의와 부서 간 칸막이 문화를 반드시 타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처럼 패스트 팔로어 전략을 고수하면 고대역폭메모리(HBM) 개발에서 실패했던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며 "AI 반도체 분야의 선도자가 되려면 중장기 전략을 수행하는 '열린 조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