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빌라왕 집에 월세 산다'…몰라서 당했다는 섣부른 비판

전세사기 세입자만의 잘못 아니야
전문가도 어렵다는 복잡한 관련 법
청년들이 거부할 수 없는 선택지

법원 경매로 넘어갔던 전세사기 피해 빌라(다세대·연립주택) 수천 가구는 누가 사갔을까. 시세보다 저렴하게 집 사려는 부동산 재테크족 아니면 실거주자일 것이라 생각했다.

현실은 전혀 아니었다. 이름 모를 법인들이 많게는 50가구씩 쓸어 담았다. 아무도 사가려는 사람이 없어 낙찰가율(감정가 대비 낙찰가) 10% 미만으로 떨어진 빌라만 노리는 ‘꾼’들이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는 제때 낙찰자로부터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지원한 자금을 회수하지 않아 ‘새로운 빌라왕’ 등장에 일조했다.

빌라 수십 채를 확보한 법인들은 당연히 ‘재임대’ 방식으로 시장에 물건을 풀었다. 이 빌라들은 입주하기에 위험하다. 전세사기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아 새로운 임차인이 임대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대책 없이 쫓겨날 수 있다. 그러나 집주인과 부동산은 이런 위험성을 숨기고 임차인을 들였다.

의문이 들었다. 전세사기 이력이 있는 빌라임을, 낙찰자들이 HUG에 돈을 지불하지 않은 상태라는 걸,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세입자 잘못 아닌가? 경기 부천에서 만난 한 30대 세입자는 전세사기 피해가 컸던 지역이라 서류를 살피고 또 살폈다고 했다. 전세사기가 무서워 일부러 월세를 골랐다. 이들이 전세사기에 ‘무지’해서 계약을 맺은 게 아니다.

우리나라 임대차 제도가 너무 어렵다. ‘사연’ 많은 전세사기 피해 주택인 경우라면 특히 그렇다. 취재 중 자문을 구했던 전문가들조차도 "굉장히 복잡한 케이스"라며 바로 답을 못했을 정도다. 두 눈으로 확인한 피해 주택 수십 채는 하나같이 전세사기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깔끔한 신축 빌라들이었다. 게다가 보증금과 월세가 시세의 절반이라면, 한 푼이 아까운 청년들에게는 뿌리칠 수 없는 선택지였을 터다.

이런 상황에서 HUG의 태도는 우려를 낳는다. 상황 파악조차 하지 못한 모습이다. 유병태 HUG 사장은 지난 16일 국감장에 나와 법인들의 전세사기 빌라 무더기 낙찰과 재임대 행태를 신문 보도를 보고서야 알았다고 했다.

유 사장은 같은 날 "법률을 잘 아시는 분들은 임차권 등기(집주인에게 전세보증금을 돌려받기 위해 세입자가 법원에 신청할 수 있는 제도)가 돼 있는 주택이 경매로 넘어갈 수 있어 위험하다는 것을 아는데, 일반 국민은 잘 모를 수 있다"며 "홍보를 강화하겠다"고 했다. 일반 국민이 잘 모를 정도로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면 진작 조치했어야 할 일이다. 빌라왕들은 바로 이 ‘정부의 무관심’과 복잡한 제도의 ‘틈새’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올해 4000가구(지난달 말 기준) 넘는 빌라들이 경매 시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분기 기준 최다 수준이다. 전세사기 여파로 경매 물건이 크게 늘었다. 일단락된 줄 알았던 전세사기의 불씨는 여전히 한 켠에 살아있다. 꺼진 줄 알았던 전세사기의 불씨는 정부의 무관심과 HUG의 무성의라는 바람을 타고 다시 타오를 기미를 보이고 있다.

건설부동산부 권현지 기자 hjk@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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