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우기자
대한항공이 러시아 관세 당국에 천억원 이상 과징금을 내야 할 상황에 부닥쳤다. 지난해 부과받은 600억원 상당 과징금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미납 이유로 1200억원에 육박하는 추가 과징금까지 요구받고 있다. 제대로 납부하지 않는다면 향후 노선 운항 재개가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11일 러시아 법령정보포털 및 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말 러시아 대법원은 대한항공이 러시아 모스크바 세례메티예보 공항세관이 부과한 과징금 41억5800만루블(약 580억원)을 내야 한다는 1심 판결 유지한다고 결정했다. 대한항공이 2022년 부과받은 과징금 83억루블이 부당하다며 상급 행정청인 연방 관세청에 이의를 제기하고 모스크바 상사법원과 러시아 대법원 등에 세 차례에 걸쳐 항소 및 상고를 진행했지만, 러시아 법원은 1심에서 과징금을 절반으로 깎아준 것을 제외하면 모두 현지 관세 당국의 손을 들어줬다.
2년여에 걸쳐 소송을 진행하면서 '혹'도 붙었다. 소송을 진행 중이라 최종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기 때문에 대한항공은 과징금을 납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세례메티예보 공항세관은 올해 과징금을 미납했다는 이유로 추가 과징금 부과를 현지 법원에 요청한 것이다. 러시아 법원은 세관의 요청을 접수하고 지난 8월 과징금 미납액의 2배인 83억루블을 추가로 더 내라고 선고했다. 대한항공 입장에선 절반으로 깎은 과징금이 다시 세 배로 불어난 셈이다. 이에 즉시 항소를 제기했지만 한 달 만에 기각됐고, 대한항공은 상고를 진행할 계획이다.
대한항공 측은 "러시아의 규범과 절차를 정상적으로 지켰고, 위법 의도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 무리한 법을 적용해 과도한 과징금을 확정한 것은 유감"이라며 "추가 과징금에 대해서는 상고법원에 상고하는 한편 양국 유관 부처를 통해 리스크 경감을 위한 실효적인 노력을 다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다만 과징금이 최종 확정돼도 안전히 납부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미국의 제재로 러시아로 대규모 송금이 어려운 실정이기 때문이다. 역시 미국의 제재 대상인 이란의 한 업체가 낸 계약금이 국내 우리은행에서 수년 동안 묶인 경우도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미국의 제재 대상에 러시아가 포함돼 있어 수백억원 규모의 금액을 시중은행을 통해 송금하기는 사실상 어려울 수 있다"라며 "다른 화폐를 이용하고 중소 은행을 통하는 등 우회하거나 수취인의 신원 조회 등의 절차를 거친다면 이론상 가능할 수도 있지만 실제 진행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항공업계에서는 러시아 당국의 '트집 잡기' 희생양이 됐다는 반응이 나온다. 앞서 대한항공이 과징금을 부과받은 것은 2021년 2월22일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해 모스크바를 경유,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향하는 화물기 KE259편이 모스크바 공항세관의 직인 날인을 받지 않고 이륙했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대한항공 측은 "러시아 법규에 따라 모든 서류와 데이터를 제출했으며 정상적으로 화물을 통관하고 세관으로부터 전자문서로 사전 승인을 받았다"며 "세관 직인 날인을 모든 절차를 지킨 점을 고려하면 위법 의도가 없었고, 이 부분도 공항 세관 당국에 여러 차례 소명했다"고 해명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과징금이 부과된 날짜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시작한 2022년 2월24일이다. 미국 등의 제재로 자금줄이 막힐 것을 염두하고 해외 기업들을 쥐어 짜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미 러시아 정부는 지난해에도 프랑스 유제품 기업 '다논'과 덴마크 맥주 제조사 '칼스버그' 등의 러시아 법인 주식을 압류했다.
서방의 대(對)러시아 제재가 풀리면서 향후 직항 노선 운항을 재개할 때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현재까지 대한항공에서 러시아를 경유하거나 직항하는 노선은 여객기와 화물기 통틀어 전무하다. 하지만 향후 운항을 재개할 때 과징금 완납을 분명히 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자국에서 낸 과징금 납부를 안 하면 체납, 지연 등에 해당해 노선 재개를 불허하거나 재개된 노선도 운항 중단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라며 "심하면 국가 간의 문제로 확대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