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 3번 끌려간 김대우씨, 끝내 사과·배상 못 받고 영면

식도암 투병 중 53세 일기로 사망
손배소 일부 승소했으나 국가가 항소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의 피해자 김대우씨가 국가로부터 사과와 배상을 받지 못한 채 투병 끝에 숨졌다.

9일 연합뉴스는 형제복지원사건 피해 생존자 모임의 발언을 인용해 전날 오전 부산 자택에서 김대우씨가 53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식도암을 앓았던 김씨는 병원에서 치료받은 후 집에서 요양하던 중이었다.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해 싸운 생전 김대우(왼쪽)씨의 모습[사진출처=형제복지원사건 피해 생존자 모임 제공, 연합뉴스]

1971년 부산진구에서 태어난 김씨는 1981년 형과 함께 길에서 놀던 중 '따라오라'는 경찰의 말에 파출소를 거쳐 형제복지원으로 처음 끌려갔다. 그 후로 그는 퇴소와 입소를 반복하면서 1981년, 1982년, 1983년에 걸쳐 총 세 차례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다. 생전 김씨는 형제복지원에서 고춧가루 고문, 구타와 노동 착취 등 온갖 가혹 행위를 겪었다고 진술했다. 그는 형제복지원 퇴소 후에도 트라우마와 함께 '형제복지원 출신'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조폭 출신'이라는 등 온갖 오해와 편견에 시달리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지난해 말과 올해 초 서울중앙지법과 부산지방법원은 각각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국가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했다. 지난 2월 부산지법은 김씨를 포함한 형제복지원 피해자 70명이 국가와 부산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해 위자료가 인정됐다. 하지만 1심 판결에 국가가 항소해 김씨는 국가의 사과와 배상을 받지 못하고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부산 북구 주례동(현재 부산 사상구 주례동)에 있었던 형제복지원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운영된 강제 수용시설이었다. 형제복지원은 부랑인 단속 및 수용을 위한 기관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가족이 있는 사람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잡아가 폭행 후 강제 노동을 시키고 원생들이 숨지면 암매장까지 했다. 이곳에서 일어난 인권 유린은 1987년 3월 직원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숨지자 35명이 집단 탈출을 감행해 외부에 알려졌다. 1975~1986년까지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이는 3만8000여명에 달하며, 이 가운데 657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김씨 빈소는 부산 동래구 착한전문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장례는 가족과 형제복지원사건 피해 생존자 모임이 단체장으로 치른다.

이슈&트렌드팀 김현정 기자 khj27@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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