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이 한창이다. 안간힘을 다해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선수들 움직임을 보면서 그 순간적 역동성과 우아한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더 정확히! 상상할 수 있는 극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을 때 펼쳐지는 장엄한 스펙터클은 한 편의 예술 작품처럼 우리 마음을 뒤흔든다. 스포츠는 정녕 ‘몸으로 쓰는 시’이고, ‘땀으로 그리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올림픽의 고향 그리스에선 경기를 아곤(agon)이라 불렀다. 아곤은 힘, 속도, 기억력 등 인간 자질의 탁월함을 겨루는 놀이이다. 고대 그리스에선 현재 올림픽과 달리 운동 경기를 통해 신체 기량만 겨룬 게 아니라 서사시 낭송, 변론술, 비극 공연 등을 통해 기억술, 설득술, 정치적 변론 등도 함께 겨루었다. 어느 분야든지, 자신의 타고난 자질을 얼마나 탁월하게 단련했는가를 증명하면 그 대가로 개인은 명예를, 그가 속한 공동체는 영광을 얻었다. 탁월함의 단련은 그리스인들에겐 인생 최고 목표였다. 오늘날 올림픽에도 이러한 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모든 경기의 핵심 질서는 공정이다. 경기는 현실의 힘이 작용하지 않는(않는다고 여기는) 이질적인 공간에서 치른다. 경기장은 현실 안에 존재하는 동시에 그 바깥에 존재하는 장소이다. 경기에는 현실과 다른 규칙이 적용된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돈이 많아도 몸과 마음을 한계까지 단련하지 않는 자는 자신의 탁월성을 보여 주지 못한다. 현실의 힘이 작용하지 못하게 경기 규칙을 끝없이 조정하는 이유이다. 이런 뜻에서 수영에서 전신 수영복 착용을 금지한 건 찬양받을 일이다. 약물의 힘을 빌린 추잡한 규칙 위반을 넘어 자본의 힘을 동원한 기술 도핑이 경기 우열을 결정하지 못하게 방지하고, 선수들이 기량 증가에 더욱더 집중하게 했기 때문이다. 현실의 약자가 영원히 승리할 수 없는 경기는 시시할 뿐이다.
그리스어로 경기 기술을 테크네(techne)라고 한다. 이 말은 본래 머릿속으로만 상상한 것을 몸으로 꺼내는 것을 뜻한다. 테크네 향상엔 단련된 신체와 함께 폭넓은 상상력, 눈부신 창조력이 함께 필요하다. 스포츠 클라이밍 볼더 경기는 무척 흥미롭다. 이 경기의의 묘미는 선수들이 미리 문제를 보지 못한다는 데 있는 듯하다. 선수들은 실내에 머물러 있다가 경기장에 나와 처음 접하는 문제를 제한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이 풀어야 한다. 빨판이라도 달린 듯 수직의 절벽에 매달리는 기적 같은 신체 능력뿐 아니라 순간적으로 루트를 설계하는 상상력과 창의력, 작은 실수조차 허용하지 않는 고도의 집중력이 있어야 승리할 수 있는 아름다운 경기다. 경기 내내 선수들의 놀라운 테크네에 온 가족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경기에서 최고의 기량을 펼친 사람은 자기 분야에서 탁월함의 주인공이 된다. 그리스어로 주인공을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라고 한다. 이 말에서 프로토(proto-)는 ‘맨 앞의’라는 뜻이다. 월계수의 주인공은 한 분야에서 모두를 무찌르고 이겨내서 맨 앞에 선 사람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행위를 작품으로 만든 인간 걸작이다. 경기마다 반복해서 프로타고니스트가 된 사람은 그 분야, 그 행위, 그 기술의 대명사가 된다. 체조에서 인간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기술에 선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이 때문일 테다. 그는 이후의 모든 선수가 연습할 때마다 그 이름을 부르는 살아 있는 전설이 된다. 인간으로서 죽음을 이겨낸 사람을 영웅이라고 한다면, 이처럼 자기 분야의 탁월함을 극한까지 단련한 사람은 불멸의 영웅이 된다.
그러나 아무나 전설이 될 순 없다. 활 재주 있다고 누구나 김우진이 되는 건 아니고, 배드민턴 좀 친다고 안세영이 되진 못한다. 누구든 탁월함을 단련하려면 극한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견뎌야 한다. 고통을 그리스어로 아고니아(agonia)라고 한다. 아곤에서 온 말이다.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흘리는 땀방울, 끝없이 찢겼다 아물면서 만들어지는 근육, 몸에 완전히 붙을 때까지 해야 하는 지루한 반복 등의 시간을 이겨야 하기에 이 말이 생겼을 것이다. 경기의 승자는 모두 고통의 승자이기도 하다. 선수 몸에 가득한 크고 작은 흉터들, 여기저기 두른 압박 붕대들, 검붉은 부항 자국들은 그 선연한 증거이다. 거듭한 고통을 견디면서 어제의 자기를 넘어서려는 의지 없이 어떤 영광도 불가능하다.
경기는 최고의 인간 향상 제도다. 패자를 죽이지 않고도 최선을 다하는 인간이 어떤 일을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알려주기 때문이다. 초원을 달리는 사자와 영양의 경기가 보여 주듯, 자연의 경기에서 패한 자는 목숨을 대가로 바친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다. 전쟁에서 패배한 자는 죽거나 노예가 되어 다시 싸움에 나서기 어렵다. 와신상담이란 말은 패자의 되갚음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경기는 다르다. 각자 최선을 다하고 승자의 영예를 인정하는 한, 경기에서 승자와 패자는 완전히 평등하다. 우리는 알고 있다. 승자의 영광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백지장 같은 차이로 경기를 내준 패자는 승자를 거울삼아 자신을 단련하고, 그를 넘어서려 밤낮으로 자신을 채찍질한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해 자기 단련을 멈추는 순간, 승자는 곧장 패자로 전락한다. 세계 랭킹 1위가 경기력을 잃고 탈락하는 장면이 얼마나 흔한가. 최선을 다한 패자에게 재도전의 기회를 부여해 노력을 멈추지 않도록 만들었기에, 경기 기록은 갈수록 경신된다. 경기의 존재 자체가 ‘마의 불가능’을 넘어서도록 설계된 영구 혁신 기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기 승패가 갈린 순간, 승자와 패자가 서로 부둥켜안는 장면은 우정의 진정한 존재 형태를 보여 준다. 이 포옹은 승자가 보여 준 탁월함에 대한 인정이면서 다음 경기를 기대하는 겨루기 약속에 가깝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말했다. "사람들은 자기 벗에서 최상의 적을 찾아내야 한다." 최고의 올림픽 선수가 보여 주듯, 진짜 우정은 서로 탁월함을 겨루는 형태로, 가장 뛰어난 적을 벗으로 삼는 형태로 존재한다. 맹자가 "서로 좋음을 요구하는 일[責善]이 친구의 도"라고 한 이유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무엇을 거울삼아 끈질기게 인내하면서 어떻게 자신을 가꾸느냐에 따라서 인생 메달 색깔은 달라진다. 올림픽 경기는 이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장은수 출판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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