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의 미래]미군문화에서 K-문화 중심지로…핫플 대명사 된 '용리단길'

⑥K-문화 중심지 도약하는 용산
노포·노후주택 혼재된 용리단길
아모레 신사옥 들어서며 재조명
탄탄한 배후수요에 인기 상권 발돋움

경의선숲길 인근 '용마루길'도 부상
서울시 25억 투입, 로컬브랜드 육성

1950년대 용산 미군 주둔하면서
'삼각지 화랑거리', '스테이크 골목' 성업
경리단길, 젠트리피케이션 상징으로

편집자주'금단의 땅'을 품고 있던 용산이 새로운 전환기를 맞고 있다. 한 세기가 넘도록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됐던 용산미군기지는 국민 모두의 공간인 용산공원으로 탈바꿈했고 대통령실 이전으로 대한민국 권력의 새로운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며 개발 계획도 본격 시작됐다.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역할 확대 요구도 이어진다. 서울 한복판, 남산과 한강을 잇는 한강 변 '금싸라기 땅'임에도 낙후된 주거지를 여전히 품고 있는 문제도 있다. 서울이 권력과 기업,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도시로서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려면 용산에 주목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선이다. 그런 의미에서 용산은 한국 도시의 현재이자 미래다.

# 베트남어가 쓰인 샛노란 차광막 아래 플라스틱 간이 테이블과 의자가 줄지어 놓여 있다. 창밖 커다란 야자수는 쌀국수를 먹는 손님 시선을 사로잡는다. 베트남 신문, 술병은 마치 베트남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골목을 따라 2분만 걸어가면 홍콩 풍경이 나타난다. 곳곳에 매달린 홍등, 한자가 적힌 포스터, 노출 콘크리트가 인상적인 허름한 중식당이다. 다시 100m를 걸으면 일본 선술집이 보인다. 경쾌한 일본 노래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손님들이 허리 높이 테이블 앞에 서서, 사케를 홀짝이고 있다.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용리단길’ 최근 풍경이다. 반경 100m 안에서 세계 각국을 만날 수 있는 ‘모자이크 스트리트(다양한 문화가 밀집된 거리)’로 변신했다. 용리단길은 아모레퍼시픽 사옥부터 지하철 3·4호선 삼각지역 사이 약 450m 길이의 거리를 말한다. 최근 몇 년 새 MZ세대(밀레니얼+Z세대) 사이에서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빅데이터 전문 기업 나이스지니데이타에 따르면, 지난해 용리단길 상권 연 매출은 2419억원에 달한다. 점포당 평균 9억원 가까운 매출을 올렸다. 이 가운데 2030세대 매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52%로 높다.

서울 용산구 용리단길 내 일본식 선술집 '키보'. 사진=권현지 기자

과거의 영광을 간직한 경리단길

용산의 거리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기록물이다. ‘○리단길의 원조’로 불리는 경리단길은 과거의 영광을 간직한 공간이다. 국군재정관리단 정문부터 서울 그랜드하얏트 호텔 방향으로 이어지는 거리와 골목길에, 과거 육군중앙경리단이 자리해 ‘경리단길’로 불렸던 거리다.

이곳은 유흥시설이 몰려 있는 이태원과 다르게 외국인이 거주하는 주택가에 가까웠다. 미군기지 이전이 본격화된 2010년대 초반부터 개성 있고 분위기 좋은 술집, 식당, 카페들이 늘어나면서 뜨기 시작했다. 근처 해방촌까지 상권이 확대되며 2015~2016년 전성기를 누렸다. 경리단길을 시작으로 ‘망리단길’(서울 망원동), ‘송리단길’(서울 송파동) 등 전국 인기 상권에 ‘○리단길’이라는 이름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경리단길 상권은 2018년 들어 무너지기 시작했다. 상가 임대료가 치솟으면서 임차인 찾기가 힘들어졌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2015년에서 2017년 사이 10.16% 올랐다. 같은 기간 서울 평균치(1.73%)보다 10배 가까이 높다.

소상공인·자영업자들이 폭등한 월세를 견디지 못하고 떠나면서 경리단길 인기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2019년 기준 공실률이 26.5%에 달하며 서울 1위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리단길의 원조’에서 젠트리피케이션(도심 특정 지역이나 장소의 용도가 바뀌어 부동산 가치가 상승하면서 기존 거주자 또는 임차인들이 내몰리는 현상)의 대명사가 됐다.

과거 용산 상권의 핵심 미군기지

경리단길에서 볼 수 있듯, 과거 용산 상권은 미군지기 영향력 아래 있었다. 1950년대 삼각지에는 ‘화랑거리’가 있었다. 삼각지역에서 한강 방향으로 이어지는 대로변에 화실, 화랑, 액자가게 등이 자리 잡으면서 ‘서울의 몽마르뜨’라는 별칭이 붙은 곳이다.

이 거리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미군이 용산에 정식 주둔하면서 생겨났다. 가난한 화가들이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준 것이 시작이다. 1960~1970년대 300여명의 화가가 활동했을 정도로 성업했다. ‘국민화가’로 일컬어지는 박수근·이중섭 화백 등도 한때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다. 1980년대 이후 대량생산된 중국산 그림이 싼값에 팔려나가면서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40여 곳의 화랑이 남아 명맥을 잇고 있다.

남영동 ‘스테이크 거리’도 미군 주둔 산물이다. 1970~1980년대 미군 부대 바로 옆 긴 직사각형 모양을 띤 남영동 골목골목에 미군 부대에서 몰래 반출된 소고기, 소시지, 베이컨 등으로 스테이크와 부대찌개를 만들어 파는 식당이 생겨났다. 값싸고 맛있는 ‘미제고기’, ‘스테끼’를 먹으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현재는 ‘털보집’, ‘서지’, ‘다사랑’ 등이 40~50년 전통을 지키며 영업 중이다.

해밀톤 호텔 뒷골목을 중심으로 한 이태원은 미군으로 인해 용산 대표 관광지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각국 주한 대사관이 들어서면서 다양한 외국 문화가 뒤섞인 역동적인 공간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미군기지 평택 이전과 함께 미군은 물론이고 가족과 군무원 등 수십만 명의 고정수요가 흔들리면서 상권이 위축됐다. 이후 경기 침체, 코로나19, 이태원 참사 등 ‘삼중고’를 겪으며 쇠락의 길을 걸었다.

아모레 업고 ‘핫플’된 용리단길

용산 상권의 대표 공간이 어려움을 겪는 동안 새롭게 떠오른 곳이 바로 용리단길이다. 그곳은 노포, 동네슈퍼, 노후주택이 혼재된 탓에 한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2018년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이 들어서면서 스포트라이트에 불이 켜졌다. 당시 아모레퍼시픽 총임직원은 6203명에 달했다. 이들을 위한 식당, 카페, 술집이 속속 생겨났다.

이후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기업 샌드박스(2020년), 연예기획사 하이브(2021년), 웰컴금융그룹(2022년) 등 대·중견기업이 잇달아 용산에 자리 잡았고, 탄탄한 배후수요를 갖춘 인기 상권으로 발돋움하게 됐다. 올해 2월 기준 용리단길에는 293개의 점포가 들어섰다. 2022년 같은 달(230개)과 비교해 27%(62개) 증가했다.

용리단길 위상은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더욱 커졌다. 세계 각국 현지 느낌을 살린 기획형 식당들이 들어서며 해외여행 욕구를 해소하려는 사람이 몰려들었다.

2019년 베트남 음식점 ‘효뜨’를 시작으로, 홍콩식 중식당 ‘꺼거’, 베트남 콘셉트의 ‘굿손’, 중식당 ‘로스트인홍콩’, 미국 샌프란시스코 분위기를 내는 양식집 ‘쌤쌤쌤’, 일본식 이자카야 ‘키보’ 등이 문을 열었다. 효뜨의 경우 베트남을 배경으로 한 영화 ‘범죄도시2’ 촬영 장소가 될 정도로 현지 음식과 공간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K-문화 중심지 도약하는 용산

용리단길과 함께, 경의선숲길과 지하철 6호선·경의중앙선 효창공원역 6번 출구 인근 ‘용마루길’(새창로14길 일대)은 새로운 상권으로 떠오르는 공간이다. 용마루길은 ‘용산과 마포를 잇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지난해 서울시 로컬브랜드 육성사업에 선정됐다. 시는 3년간 25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시설·인프라 개선, 소상공인 양성 등을 통해 이 일대를 서울 지역 대표 상권으로 키울 계획이다. 현재 와인바, 디저트 카페, 이자카야, 퓨전 음식점 등이 새로 생겨나고 있다.

이와 함께 용산은 K-컬처 중심지로 거듭나고 있다. 1994년 옛 육군본부가 충남 계룡으로 이전하며 생긴 부지에 전쟁기념관이 건립된 데 이어 2005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사 왔다. 전쟁기념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지난 한 해 관람객은 각각 283만명, 418만명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120년간 일반인 출입이 통제됐던 미군기지 부지는 약 90만평 규모 용산공원으로 탈바꿈해 시민 품으로 돌아올 전망이다. 방탄소년단(BTS)을 키운 연예기획사 하이브가 2021년 용리단길로 사옥을 이전하면서부터는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찾는 글로벌 관광 명소가 됐다.

건설부동산부 권현지 기자 hjk@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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