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영기자
차민영기자
제이미 앨런 아시아기업지배구조협회(ACGA) 사무총장과 한국 자본시장의 인연은 남다르다. 1998년 한국의 외환위기 직후 한국을 방문한 이후 그는 25년 동안 우리나라 자본시장의 발전사를 지켜봤다. 김대중 정부 때부터 윤석열 정부에 이르기까지 한국 자본시장을 경험하고 목도한 그는 "외환위기 이후 방문한 한국은 상당히 우울한 상태였고, 지금은 그때와 비교해 더욱 개방적이고 활기찬 시장으로 변모했다"고 증언했다.
앨런 사무총장이 이끄는 ACGA는 아시아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1999년 홍콩에 설립된 비영리 기관이다. 아시아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연구, 교육활동을 수행하고 회원사를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 전 세계 18개 시장의 연기금과 국부펀드, 자산운용사, 글로벌 투자은행(IB), 상장사 등 101개사가 회원이다. 25년 동안 ACGA의 사무총장을 맡았고 은퇴를 앞둔 앨런 사무총장을 지난달 27일 서울 여의도 글래드호텔에서 아시아경제가 단독 인터뷰했다.
앨런 사무총장은 "2016년부터 2019년까지 매년 한국을 방문했지만 주로 연례 콘퍼런스가 열리는 연말에 방문했다"며 "정기 주주총회(AGM) 시즌에 맞춰 방문한 것은 이번이 최초이며, 오전에는 정기 주총에 참석하고 오후에는 금융위원회 등 규제 기관들과 만났다"고 전했다.
ACGA 대표부와 해외 투자자들은 지난달 25일부터 28일까지 한국을 방문해 한국거래소, 국민연금, 금융위원회, 자본시장 연구원 등 국내 정부 및 연구기관들과 면담을 진행하는 등 숨 가쁜 일정을 소화했다.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 영국계 팰리서 캐피털과 페더레이티드 헤르메스, 홍콩계 행동주의펀드 오아시스, 노르웨이연기금, 네덜란드연금자산운용(APG), 골드만삭스자산운용, JP모건자산운용 등이 ACGA 사무국과 동행했다. ACGA는 연례행사처럼 매년 연말에 아시아지역에서 열리는 콘퍼런스에 맞춰 한국을 찾았지만, 올해는 처음으로 정기 주총 시즌에 한국에 방문했다. 한국 자본시장이 정부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도입으로 변곡점에 서 있다는 점에 비춰볼 때 주총 시즌에 한국을 방문한 이유가 설명되는 대목이다.
그는 한국 정부가 밸류업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것을 매우 긍정적인 시도라고 평가했다. 앨런 사무총장은 "ACGA에서 거의 25년 동안 한국의 디스카운트 문제에 관해 이야기해왔고 과거에도 이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면서 "보시다시피 한국의 10년간 평균 주가순자산비율(PBR)이 (다른 시장과 비교해) 훨씬 낮다"고 지적했다.
그는 PBR을 비롯해 자기자본이익률(ROE), 배당금 지급률과 같은 지표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앨런 사무총장은 "이러한 지표들이 코리아 디스카운트 그 자체이고, 이는 분명히 기업 거버넌스 문제 때문"이라며 "정부가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기업의 사외이사 역할을 강조하고 정부가 기업에 컨설팅과 밸류업 관련 교육을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힌 점도 후하게 평가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문제를 해소하려는 정부의 이러한 시도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프로그램 도입 과정이 성급하게 진행됐다는 점은 아쉽다고 지적했다. 그는 "프로그램 도입과 전체적인 방향성을 지난 2월 말에 발표하고도 상세 가이드라인은 5월에 나온다고 해 급하게 진행된 느낌이 있다"며 "정부가 기업에 요구하는 점을 기업들 스스로가 분명히 알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초반에 제시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밸류업 프로그램이 안착하려면 대기업의 경우 밸류업 이행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부가 발표한 밸류업은 의무화가 아니라 기업의 자발성을 기대하는 조치로 사실상 기업의 자발적 움직임에 프로그램 성패가 달려있다. 이에 대해 앨런 사무총장은 "작은 규모의 상장사는 차치하고서라도 대기업은 기업 계획 공시를 의무화해야 한다"며 "정부는 기업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설명했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이 밸류업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한 일본의 사례를 제시했다. 앨런 사무총장은 "일본이 시행하는 밸류업 프로그램에 담긴 내용은 (PBR 1배 이하 기업에) 사실상 의무이며 이를 이행하도록 일본 기업에 많은 압력이 가해진다"며 "한국 기업이 협조적이지 않을 수 있으므로 한국 정부는 보다 강력한 수준의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기업 참여를 끌어내기 위해선 기업 명단을 공개하는 '네이밍 앤드 셰이밍(naming and shaming·이름 거론해 망신 주기)'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밸류업의 선구자 격인 일본 도쿄증권거래소는 올해 1월부터 거래소의 지침을 실제로 준수하는 기업의 명단을 발표했다. 그는 "직접적인 망신 주기는 아니지만 간접적인 망신 주기 방식으로 어느 회사가 밸류업을 준수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며 "이는 일본 기업에 상당한 동기 부여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의 영문공시 의무화도 촉구했다. 이는 지난 2월 밸류업 초안 공개 당시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이 지적한 부분이기도 하다. 앨런 사무총장은 "한국이 글로벌한 시장으로 인정받으려면 영문공시를 강화해야 한다"며 "무엇보다 밸류업 프로그램이 한국에 대한 더 많은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란 점에서 대기업에 한해서는 영문공시를 권고사항이 아닌 의무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조언했다.
밸류업 프로그램 자문단에 외국인 투자자들을 포함해야 한다고 권고하기도 했다. 그는 "운용사 같은 외국계 주요 기관투자가들을 자문단에 포함한다면 정말 좋을 것"이라며 "이는 정부와 규제기관과의 소통을 돕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했다.
주주 중심의 거버넌스를 만들기 위한 상법 개정도 이뤄져야 한다고 언급했다. 재계의 거센 반대가 있더라도 현재 총수 또는 경영자 중심의 거버넌스에서 주주 중심의 거버넌스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앨런 사무총장은 "이사의 충실의무와 관련한 상법 개정이 중요하다"며 "투자자들이 원하는 것은 상법이 개정돼 이사회가 회사와 주주 모두에게 의무가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라고 요구했다.
연초 바닥을 기던 한국 증시는 밸류업 프로그램 도입과 맞물려 모처럼 호황기를 맞고 있다. 올 초 외국인의 국내 주식 시장 순매수 규모는 16조원을 넘어서며 이달 코스피 2800선 돌파에 대한 기대감도 커졌다. 그는 "정치 환경, 성장 둔화 등의 이유로 중국 투자에 대한 글로벌 투자자들 인식이 매우 부정적으로 형성됐고 그 결과 최근 대규모 자금이 중국을 이탈했다"며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성공적인 회사들이 많고, 저평가된 회사들이 많아 가치가 향상되면 분명히 돈을 벌 기회가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우리나라 상법에 따르면 상장회사가 주총을 소집하려면 주총일의 2주 전에 이를 주주들에게 알려야 한다. 기한 직전에 주총 계획을 공시하는 등 매년 반복되는 주총 쏠림현상도 문제지만 주총 소집일이 짧아 해외 투자자나 개인 소액주주들은 의결권을 행사하기 전에 안건에 대해 숙고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거론된다. 호주, 영국 등 해외 주요 선진국만 봐도 주총 소집 공고를 우리나라보다 긴 21일 전후로 공시한다.
앨런 사무총장은 "대부분의 다른 시장은 주총소집일 공시를 주총 개최 전 21일 또는 28일 전에 해야 하지만 한국은 이보다 기한이 짧아 해외 투자자들이 투표하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며 "한국도 최소 주총 개최 21일 혹은 28일 전에 이를 고지하는 등 주총 소집 기한을 최대 14일 연장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해외 투자자들의 경우 투표가 진행되는 절차상의 이유로 의사결정을 내릴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해외 투자자들은 글로벌 수탁 은행이 설정한 마감일에 따라 투표해야 하며, 글로벌 수탁 은행은 투표를 마감한 뒤 현지 수탁 은행에 보낸 뒤, 투표 결과를 다시 회사로 전달한다.
그는 또 "ACGA 회원 일부는 3월 첫째 주에 한국 방문 계획을 세웠을 때 어떤 정기주총에 참여할지 결정하려고 했지만, 당시엔 주총 소집 계획을 알 수 없었다"면서 "많은 회사가 2주 전까지 주총 계획을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외국인 투자자의 의결권 행사를 하기 어렵게 만드는 데는 까다로운 절차도 한몫한다. 그는 "우리 회원들이 정기주총에 참석 신청을 할 때 일부 회사들은 (참석하기까지 절차가) 상당히 어려웠다"며 "일단 주총에 참석할 때 모든 종류의 문서와 위임장을 가져가야 하고, 통역도 없다. 우리 회원이 통역사를 데려가려면 통역사도 주주여야 한다고 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 자본시장이 많은 변화를 이루었지만, 주총 문화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일갈했다.
포이즌필(신주인수선택권)과 차등의결권 등 경영권 방어 조치 도입 시도에 대해서는 우려 섞인 반응을 보였다. 한국 자본시장이 개방된 이후 기업들은 늘 외부 공격에 대비해 다양한 경영권 방어 수단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기업이 도입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방어 수단이 바로 포이즌필과 차등의결권이다. 앨런 사무총장은 "우리는 정부가 밸류업 프로그램과 함께 포이즌필이나 차등의결권 제도와 같은 방어 수단을 도입하지 않기를 간절히 희망한다"며 "이는 한국 시장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시장 가치를 저해할 뿐 아니라, 밸류업 프로그램의 가치도 약화시킬 것"이라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경영 방어 조치는 경영진과 지배주주를 보호하기 위해 설계됐는데 그들은 책임지고 싶어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하고 싶어한다"며 "이로 인해 주주는 해당 회사 주식을 매수하지 않고 그 결과 주가는 하락한다. 매우 간단한 논리"라고 단언했다.
앨런 사무총장은 페이스북처럼 차등의결권 제도를 가진 기술회사들이 있지만 마이크로소프트(MS), 애플, 아마존과 같은 기업은 차등의결권 제도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차등의결권 제도가 경영진을 보호할 수는 있지만, 회사 성공이나 주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면서 "방어 조치의 목적은 적대적 인수를 방어하는 데 있는데 한국은 적대적 인수 사례가 드물고 우리 회원 중 누구도 적대적 인수를 시도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누가 삼성을 인수하려고 시도하겠냐"라고 반문했다.
또 일본은 포이즌필을 일찍이 도입했지만 이를 철회한 기업 수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했다. 그는 "일본은 대략 15년 전에 560개 상장사가 포이즌필을 도입했지만 현재 이를 보유한 상장사 수는 200~250개 사로 줄었다"면서 "일본의 밸류업 프로그램의 일부는 기업의 재구조화를 말하며 이는 기업이 배당금을 더 많이 지급하고 지속 가능한 사업 모델을 구축하는 것을 뜻한다. 일본의 주주들은 포이즌필을 원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ACGA는 2년마다 아시아 각국의 지배구조에 대해 분석한 리포트를 공개한다. 아시아 12개국 순위를 매기는데, 한국은 20년 넘게 하위권에서 맴돌고 있다. 우리나라는 2023년 12월 보고서에서 8위로 집계됐다. 일본은 5위에서 2위로 세 계단 뛰었고 한국보다 순위가 낮은 국가는 태국,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정도다. 앨런 사무총장은 한국의 지배구조에 대해 "7개 카테고리 대부분에서 점수가 향상됐는데 정부 부문에선 점수가 하락했고, 상장사 부문은 기본적으로 변화가 없었다"며 "정부 부문의 점수가 하락한 이유에 대해 개인투자자 유입 등으로 개인 주주 수가 크게 늘었음에도 정부에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명확한 전략이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상장사 부문의 점수가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데에는 "거버넌스 관행과 공시를 분석해봤을 때 대부분의 영역에서 기업들이 부족한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이라며 특히 이사 보수에 대한 정보가 매우 부족하다고 짚었다.
이사회 교육기관 설립도 제안했다. 이는 밸류업 프로그램의 성공과도 직결되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밸류업 프로그램이 성공하려면 재무관리, 수익성 등 재무 사항에 대해 이사회 구성원들의 교육이 필요하다"며 "고위 임원, 내외부 이사 등 이사회에 참가하는 모두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현재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일본 등 아시아 대부분 국가가 '이사회 교육기관(Institute of Directors)'이라고 불리는 협회를 운영한다.
그는 25년 동안 한국 자본시장을 지켜본 소회도 전했다. 국내 자본시장에 변화의 기미가 뚜렷했던 시기를 2016년이라고 회상했다. 앨런 사무총장은 "ACGA 활동 초창기 한국 기업은 우리와 대화하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2015년부터 기업들의 태도가 점점 더 개방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며 "그것이 우리에게는 전환점"이라고 했다. 그는 "싱가포르, 일본, 대만과 비교해 한국 기업들은 이사회 면담에서 놀랍도록 개방적"이라며 "2016년에 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Corporate Governance Codes)이 개정됐고,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지침)도 도입된 점도 긍정적인 변화의 예시"라고 한국 자본시장의 성과를 돌아봤다.
끝으로 그는 국내 재벌의 고질적 관행에 대해서도 쓴소리했다. 그는 직접 '재벌'이라고 발음하며 "소수 지분만 보유하면서 순환 출자 구조를 이용해 기업 전체와 이사회를 통제하려고 한다면 이는 매우 문제라고 본다"며 "이럴 경우 기업 투명성과 보다 강화된 기업 거버넌스가 필요하다"고 봤다. 이러한 병폐를 근절하려면 사외이사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많은 사외이사가 학자, 회계사, 교수, 검사 등으로 구성되는데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사업 경험이 풍부한 사외이사"라면서 "이사회 임명과정을 개방적으로 만들어 정상화할 필요가 있다"고 피력했다. 적법한 이사회 임명 절차와 이사회 구성이 보장돼야 주주에 기반한 의사결정이 가능하고, 경영진이 이사회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