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기억력은 차별적이다. 어떤 것은 수십 년 동안 또렷이 기억하고 어떤 건 며칠만 지나도 잊어버린다. 나는 엉뚱하게도 37년 전에 봤던 책 표지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1987년, 집에 굴러다니던 ‘추억의 팝송’이라는 제목의 노래 모음집이다. 제목 그대로 추억의 팝송을 소개하고 간단한 악보와 기타 코드를 곁들인 형식이었고 표지에는 비틀스 멤버 4명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두툼한 책에는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 린다 론스타드의 ‘롱 롱 타임’, 레드 제플린의 ‘천국으로 가는 계단’ 등등 소위 주옥같은 팝송이 수록되어 있었다. 아마 그 시절 비슷한 제목의 책이 수십 종은 나왔을 테고, 그 안에 들어있는 노래들도 비슷비슷했을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의아하다. 이런 ‘추억의 팝송’들은 대부분 1970년대 노래인데, 책이 발매된 해를 기준으로 10년이나 15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곡이었다. 지금 테일러 스위프트의 ‘러브스토리(2009년 발매)’나 브루노 마스의 ‘카운트 온 미(2010년 발매)’를 추억을 팝송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말이다. 사실 나온 지 20년도 훨씬 넘은 2000년대 초반의 노래도 추억의 팝송이라고 부르기 어색하다. 팝의 역사도 인간의 수명도 늘어났으니 ‘추억’이라는 칭호에 필요한 시간도 길어졌다고 추측해본다. 그렇다면 1990년대 노래에는 이제 추억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될까? 세기도 나누어졌으니까 그래도 될 것 같다.
최근 1990년대 후반에 태어난 후배 피디들이 입사하고 있다. 1999년생까지 있으니 내년에는 2000년대생 후배가 들어올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젊은 피디들은 1990년대 가수들을 잘 모른다. 태어나기 전에 활동하던 가수를 잘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인데, 노래 고르는 일이 업무이다 보니 종종 실수가 생긴다. 한 번은 내가 연출하는 프로그램에 조연출로 있던 후배가 ‘알 켈리’의 노래를 선곡한 적이 있다. 나는 알 켈리가 아동 성폭력으로 사실상 종신형(80세가 넘어서야 출소한다)을 받은 중범죄자이기에 그의 노래를 안 트는 것이 좋겠다고 알려주고, 비슷한 느낌의 다른 노래를 골라보라고 했다. 한참 노래를 찾던 후배가 고른 노래는 ‘퍼프 대디(디디라는 예명으로 바꾼)’의 노래였고 별문제 없이 방송에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퍼프 대디의 노래도 틀 수 없을 것 같다. 그가 성추행, 성폭행, 성매매, 인신매매 등 온갖 성범죄를 저질러왔다는 혐의가 제기되어 며칠 전 자택이 긴급수색을 당했고 그 장면이 고스란히 생중계되었다. 무려 장갑차와 헬리콥터까지 동원된 대작전이었다. 범죄의 대상이 남녀를 가리지 않았고 현재 활동 중인 스타들까지 피해자라는 혐의 내용에 팬들은 더욱 큰 충격에 빠졌다. 재판 결과가 나오려면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현재 수사기관에서 확보한 증인과 증거를 볼 때 알 켈리 못지않은 중형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범죄 행각이 밝혀지기 전까지 알 켈리는 내가 꼽는 1990년대 최고의 솔 가수였다. 그리고 재산이 1조가 훨씬 넘는 것으로 알려진 퍼프 대디는 제이지와 더불어 팝 역사상 가장 성공한 래퍼가 분명하다. 눈부신 재능과 타락한 영혼을 함께 지닌 그들은 이제 나를 비롯한 많은 팬의 추억에서도 쫓겨날지도 모르겠다. 예술과 인성은 별개라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정도 문제니까. 부디 소중한 추억의 팝송이 더 줄어들지 않기를.
이재익 SBS라디오 PD·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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