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선진기자
세계 경제 패권을 두고 중국과 경쟁을 벌이는 미국의 보호주의가 날로 심화하고 있다. 첨단 기술에 대한 대중국 포위망이 날로 촘촘해지고 있는 가운데 미국 내 굴기를 키워나가고 있는 중국 기업 ‘지우기’는 갈수록 노골화되고 있다. 정보기술(IT)·친환경·조선업 등 분야가 제2차 미·중 간 무역전쟁의 전선이 될 것이란 시각이 많다. 중국에 대한 무역 적자를 줄인다는 게 목표다.
인공지능(AI) 패권을 쥐기 위한 핵심 분야인 최첨단 반도체는 미국이 중국의 접근을 막아야 하는 1순위 전략기술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2022년 10월 자국 기업 반도체 및 제조장비의 중국 수출을 통제하기 시작한 가운데 한국, 일본, 네덜란드 등 동맹국 참여도 독려해왔다. 미국 정부가 천문학적인 규모의 반도체 보조금을 인텔, 마이크론, 삼성전자, TSMC 등 국내외 기업을 가리지 않고 지급하고 있는 건 글로벌 반도체 산업을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의지다.
미국은 그럼에도 중국이 우회 경로를 통해 첨단 반도체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지난해 8월 화웨이가 보란 듯 중국산 7㎚(나노미터·10억분의 1m) 칩이 탑재된 스마트폰 ‘메이트 60 프로’를 공개한 게 대표적이다. 네덜란드 소재 세계 유일 극자외선(EUV) 생산 기업 ASML이 지난해 9월부터 심자외선(DUV)마저 중국 수출 통제에 나선 건 미국의 압박이 있었다는 분석이다. 웨이퍼에 가장 얇은 회로를 새길 수 있는 EUV가 첨단 칩 생산의 핵심 장비인데, 화웨이 7㎚ 칩이 EUV 대비 이전 기술인 DUV를 통해 제작됐을 거라는 추정에서다.
미국은 반도체 공정에서 백엔드 전문 공장이 밀집된 동남아시아 국가마저 포섭하고 있다. 미국 상무부는 최근 필리핀에 10억달러 이상의 신규 투자를 약속하며 제조 설비 역량을 두 배 수준으로 올리겠다고 약속했다. 지나 러몬도 상무부 장관은 지난 13일 태국 방콕을 찾아 “태국 등 국가들이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를 중심으로 한 반도체 공급망 다각화에서 혜택을 볼 수 있다”며 협력을 당부하기도 했다.
반도체와 공급망 중심이던 미·중 무역전쟁의 전선이 안보 영역으로 급물살을 타고 있다는 평가다. 미국은 “유사시에 중국 공산당에 의해 자국민 데이터가 악용될 수 있다”며 중국 IT, 바이오, 중공업 분야를 조준하고 있다. 지난 13일 숏폼 플랫폼 틱톡의 모기업 바이트댄스가 165일 내 틱톡을 매각하지 않을 시 미국 내 앱 유통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틱톡 금지법안이 미국 하원을 통과했다. 법안이 통과되면 미국에서 입지를 빠르게 다져가는 중국계 전자상거래 업체 테무, 알리 등도 비슷한 이유로 퇴출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안보 문제를 구실로 한 미국 내 중국 기업 지우기는 시작되고 있다. 미국 행정부는 자국 항만에 즐비한 중국산 크레인들의 교체 계획을 지난달 마련한 바 있다. 크레인에 장착된 첨단 소프트웨어가 ‘트로이 목마’가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바이든 대통령은 같은 달 28일 유전체, 건강 데이터 등 자국민 바이오 정보가 중국 등 우려 국가로 이전되는 것을 규제하기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미국 내 영업하는 중국 우시앱텍, 컴플리트 지노믹스 등을 겨냥했다는 분석이다.
주요 외신은 “조선업, 태양광 산업이 미·중 무역전쟁의 잠재적인 전선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전미철강노조를 비롯한 5개 노조는 최근 미 무역대표부(USTR)에 조선업에서 중국 업계가 정부로부터 세금감면 등 혜택을 받으며 성장해 온 불공정한 관행을 조사해 달라고 청원했다. 중국은 2021년 한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선박 생산국으로 올라섰다. 반면 미국의 선박 생산 점유율은 1% 정도다.
미국 태양광 업계도 태양광 패널 가격의 폭락 원인이 중국제품에 있다며 정부의 규제를 요구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에 따르면 태양광 패널의 글로벌 가격은 1년 전보다 50% 하락한 와트당 10센트 안팎으로 거래되고 있다. 지난해 중국이 태양광 패널 생산량(1조와트)을 두 배로 늘린 탓이다. 미 최대 태양광 업체 퍼스트 솔라의 마크 위드마 최고경영자는 지난 12일 상원 재정위원회 청문회에서 “이대로 가다간 미국이 중국의 일대일로 이니셔티브의 연장 경로가 될 것"이라고 호소했다.
또 미국은 중국의 ‘덤핑 관행’도 산업별로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12일 “중국 수출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이는 전 세계 일자리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보도했다. 내수 침체에 갇힌 중국이 정부 보조금을 받은 덤핑 수출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처럼 미국이 전 산업 영역에서 보호주의를 강화하고 있는 까닭에는 대(對)중국 무역 적자가 자리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 중국과의 교역에서 2794억달러의 적자를 냈다. 역사상 가장 큰 무역 적자를 냈던 전년 대비 27% 감소했지만, 중국의 우회 수출로 실제 적자 폭이 크게 줄어들지 않았을 거라는 분석도 많다.
중국은 “공정한 무역 경쟁을 저해한다”며 반발한다. 하지만 중국으로서는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높은 수준의 관세 장벽에도 무역수지 흑자를 보고 있는 만큼 미국 시장은 포기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지난해 미국 최대 교역국이 중국을 제치고 멕시코가 된 데는 중국의 니어쇼어링(특정 국가로의 생산기지 이전)이 자리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국가에 대한 중국 직접 투자 유입도 늘고 있다.
미국 정치권에서 중국과 연관된 해외 생산기지 등에 대한 추가 제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15일 오하이오주 데이턴에서 열린 집회 연설에서 “멕시코산 중국차에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엄포에 나선 건 이 같은 중국의 우회 수출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11월 대선을 앞둔 만큼 분야별 치열한 중국 견제를 강화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지난해 11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년 만에 가진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 간 관계 회복에 뜻을 모았지만, 중국에 대한 미국 여론이 압도적으로 부정적인 만큼 대선 이슈에서 ‘중국 때리기’는 불가피하다는 이유에서다. 미국인 10명 중 4명은 중국을 적국으로 보고 있다는 갤럽 조사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