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진기자
"운이 좋아서겠지만, 서구(서유럽과 북미) 중심의 미술사를 글로벌한 미술사로 보게 하는 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 최초의 유럽 미술관장. 이숙경 영국 맨체스터 휘트워스뮤지엄 관장(55·예술감독)이 얻은 타이틀이다. 큐레이터 생활 32년 차인 그는 경계를 거침없이 넘나들며 ‘최초’라는 수식어와 수십 년을 함께했다. 이 관장은 2007년 테이트 역사상 첫 동양인 큐레이터였다. 전면에서 영국이 세계 현대 미술의 중심에 올라서는 과정을 목격하고 직접 힘을 보탰다. 6일 아시아경제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본인이 그동안 이뤄온 일 중 가장 큰 성취에 대해 글로벌한 미술사를 언급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연간 방문객 수 기준 세계 5위권 미술관이 된 테이트 모던에서 16년간 쌓아온 노력과 성과를 바탕으로 이 관장은 지난해 8월 휘트워스뮤지엄의 수장이 됐다. 그는 관장 선임 직후에도 "세계 미술계와의 글로벌 연결망을 더욱 넓히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동안 중요하게 생각했던 ‘미술사의 시각을 넓히는 일’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의미다. 이 관장의 시선은 소위 ‘주류’라 불렸던 서구 미술을 넘어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현재 휘트워스뮤지엄 관장이자 다음 달 개막 예정인 세계 최대 미술 축제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일본관을 담당하는 첫 외국인 큐레이터다. 주로 어디서 활동하고 있나.
△주로 맨체스터에서 지낸다. 조직을 이끄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해야 할 일이 많다.
-미술계에 처음 발을 들이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닌 큐레이터를 하게 된 이유는.
△계속해서 미술사와 미술 이론을 공부했다. 미술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은 어릴 때부터 있었다. 그러한 관심이 반드시 미술가, 예술가로서 발현되는 것보다 평소 갖고 있던 인문학적인 관심과 맞닿는 부분을 찾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다. (1986년) 홍익대에 예술학과가 생기면서 ‘아 이런 것도 공부할 수 있는 과목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인문학이 원래 다양하고 광범위하지 않나. 역사, 미학, 문학, 예술까지 연관되기도 한다. 그러한 점에서 흥미로운 학문이라서 박사까지 (공부)하게 됐다. 대학 입학 전엔 직업으로서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몰랐다. 처음엔 미술 비평 같은 부분에서 일할 수 있지 않겠나 하고 생각했다. 이후에 큐레이팅이라는 분야를 알게 되면서 그렇게 국립현대미술관에 들어가게 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최연소 학예사로 있다가 1990년대에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해외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었나.
△계획해서 유학을 간 건 아니었다. 당시 영국 문화원의 펠로십을 받게 돼서 우연치 않게 유학을 하게 됐다.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학문적인 풍토에 굉장히 좋은 인상을 받았다. 또 사회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한국과 달랐다. 어떤 게 좋고 나쁘고를 떠나 ‘다름’ 그 자체가 흥미롭게 느껴졌다. 좋은 기회를 얻어 공부하면서 한국에서는 몰랐던 세계가 있고 다른 문화와 풍토가 바깥에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당시에만 해도 영국보다는 프랑스, 미국 뉴욕을 현대 미술의 중심이라고 여겼다. 현대 미술이 영국 사회에서 어떤 큰 역할을 하게 된 시기가 처음 영국에 왔던 시기와 맞아떨어졌다. 1990년대 말에 영국에 도착해서 2000년에 테이트 모던이 생기는 시작점부터 쭉 봐왔다. 영국이 짧은 기간 안에서 현대 미술에 대한 관심은 커지고 영향력도 크게 얻는 시점이었다. 이러한 변화가 내가 이 분야의 전문인으로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보수적인 영국 사회 그리고 백인·서구·남성 중심의 미술계에서 그렇게 큰 변화의 시기에 아시아인이자 여성으로서 좋은 점도, 안 좋은 점도 있었을 듯 싶다.
△성별에서 오는 차별은 거의 없었다. 다만 아시아 미술, 특히 비서구 미술에 대해서는 굉장히 무지했다. 서구 사회라고 하면 보통 서유럽과 북미를 말하는데, 이쪽에서는 글로벌한 측면에서의 미술사에 대해서는 거의 지식이 없었다. 처음 영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아시아 미술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특수하고 소수인 경향이 많았다. 지난 20년간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 미술사 자체가 서구 중심으로 서사가 잡혀 있었다. 경제학, 정치학도 모두 이렇게 서구 중심적으로 돼 있지 않나. 이제 좀 바뀌기 시작하는 것 같다. (아시아인으로 영국에서 자리를 잡게 된) 내가 그러한 변화의 일부였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뤄온 일 중에 스스로 생각하기에 가장 큰 성취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운이 좋아서겠지만, 서구 중심 미술사를 훨씬 글로벌한 미술사로 보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영국 각지에 박물관을 운영하는) 테이트에서 16년간 일하면서 개인적으로도, 미술관으로서도 중요했던 것이 ‘어떻게 서구 중심 관점을 깨고 글로벌한 관점으로 미술을 볼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당시 테이트 미술관 같은 경우에는 소장품에 한국 미술가의 작품이 거의 없었다. 백남준처럼 아주 중요한 미술가 작품도 없었다. 굉장히 큰 갭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테이트 모던에서) 아시아 미술을 담당하면서 처음으로 백남준 전시도 하고 관련 소장품도 늘렸다. 백남준, 이우환, 양혜규의 작품이 (소장품으로) 들어갔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오노 요코(일본), 구사마 야요이(일본)도 (소장품에) 들어갔다. 서구 미술에 비서구 큐레이터로 처음 들어가면서 시작한 것이 그런 부분이었다. 그 이후에는 다양한 국적을 가진 동료들이 들어오게 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이러한 경향이) 퍼질 수가 있었다. 아프리카나 남미까지. 나는 호주를 비롯해 태평양 지역까지 전부 관장했다. 나중에는 (2019년) 현대자동차가 후원한 ‘현대 테이트 리서치 센터: 트랜스내셔널’의 수장을 맡기도 했다. 테이트 모던은 이러한 글로벌 비전 때문에 설립한 지 24년밖에 안 됐지만, 세계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미술관이 됐다.
-이번에는 성취와는 정반대로 인생을 통틀어서 스스로 생각했을 때 최대 위기는 언제였나.
△코로나19 때문에 봉쇄되고 그러한 경험이 굉장히 큰 위기였다. 전문가로서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그러했다. 일단 한국과 영국이 이렇게 멀고 분리가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또 큐레이터로서는 사람들이 미술관에 올 수 없는 때였다. 미술관이 문 닫는 상황은 처음 봤다. 일종의 전환점이 됐다고 생각한다. 좀 더 근본적으로 예술가와 관객을 매개하는 것이 무엇인지, 미술관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미술관의 역할은 무엇이고 왜 사람들은 미술관에 와야 하는지 등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됐다. 그때가 광주비엔날레 예술 감독으로 초청받은 때였다.(지난해 열린 광주비엔날레는 2006년 이후 17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인 예술 총감독인 이 관장의 손에서 탄생했다) 그러한 질문에 대한 생각을 광주비엔날레에서 풀어냈다. 이전에는 미술사를 비롯해 좀 더 객관적인 차원에서 생각했다면 좀 더 주관적으로도 사유해 보는 기회가 됐다.
-스트레스 해소법이 따로 있나. 여가시간엔 주로 무엇을 하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성격은 아니다. 그래도 스트레스를 받을 땐 주로 공원에서 산책한다. 영국은 주변에 자연이 많고 공기도 맑다. 큰 자연 속에 있으면 아무래도 관점이 좀 달라지는 것 같다. 산책을 하고 몸을 움직이는 게 물론 도움이 되겠지만, 좀 더 큰 자연 속에서 넓은 관점으로 (스트레스받았던 일을)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여가엔) 영화도 좋아하고 책도 좋아해서 다양하게 보고 읽는다. 큐레이터는 (인문학적인 소양이 중요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는 종합 예술이어서 실제 어떤 주제나 테마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지 보기가 쉽다. 다문화적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참조하기가 좋은 매체다.
- 지금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을 좀 많이 해 왔는데 현재 진행 중인 도전은 무엇인가.
△사실 뭔가 인생의 계획을 세워서 그걸 성취하면서 사는 사람은 아니다. 지금은 휘트워스가 가장 중요한 과제다. 내가 휘트워스를 선택한 이유는 이 미술관의 잠재력이 굉장히 크다고 봤기 때문이다. 맨체스터라는 도시도 굉장히 흥미롭다. 맨체스터는 산업 혁명의 본산지이기도 하면서 식민주의의 역사 속에서도 중심에 있는 도시다. 동시대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도 대중음악의 본산이기도 하다. 이 흥미로운 도시에 있는 휘트워스 미술관을 어떻게 더 대중에게 가까우면서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제 질문이다. 대중과 친화적이면서 전문성을 바탕으로 하되 흥미롭고 이해하기 쉬운 전시를 보여주는 것, 또 예술가에게는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플랫폼이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관장님이 새로운 도전을 하게끔 하는 동력이 있나.
△어렵다고 포기하지 않는 것인 듯싶다. 문제를 덮어두기보다 항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해결하려고 한다. 다른 사람과 함께 고민한다. 공동의 고민으로 만들고 공동의 고민이라는 걸 밝혀준다.
-여성 선후배들 그리고 동료 여성 사회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 있다면.
△일종의 여성들끼리 연대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특히 여성일수록 여성을 잘 도와주자는 것이다. 여성은 다른 여성과 경쟁의 위치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두세 명의 여성이 경쟁해서 한 명만 올라가는 경우가 많다. 경쟁하지 말고 함께 연대하는 것이 중요할 듯싶다. 또 성차별도 물론 중요한 이슈이지만, 차별 자체에 대해 도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종 차별이나 계층 차별도 있을 수 있다. 차별을 문제 삼고 의구심과 도전 정신을 계속해서 가졌으면 좋겠다. 여성들이 그런 부분들을 선도적으로 질문하는 입장에 섰으면 좋겠다.
한국에서 태어나 홍익대 대학원 재학 시절인 26세에 최연소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가 됐다. 이후 영국으로 이동, 에식스대 박사과정을 마치고 2007년 테이트 미술관에서 첫 동양인 큐레이터가 됐다. 이후 테이트 아시아·태평양 리서치센터 책임 큐레이터, ‘백남준 회고전’ 등 테이트 모던의 전시 기획자로 활동하며 국제미술 수석큐레이터로 활동했다. 2019년에는 ‘현대 테이트 리서치 센터’ 수장을 맡기도 했다. 코로나19 사태 여파가 남아 있었던 2023년에는 ‘제14회 광주 비엔날레’ 예술 감독을 맡았다. 17년 만에 한국인이 맡은 예술 총감독이었다.
세계 최대 미술 축제인 ‘베니스 비엔날레’와의 인연도 깊다. 2015년 한국관 전시 예술 감독이었으며 올해 4월에는 일본관 예술 감독을 맡았다. 일본이 베니스 비엔날레 국가관을 설치한 이후 70년 만에 외국인 큐레이터가 맡게 돼 화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