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정민기자
제21대 총선에서 부산 최고 득표율의 주인공은 정치인 하태경이다. 그는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 후보로 해운대갑 지역구에 출마해 59.5%를 득표했다. 해운대는 부산에서 보수정치 강세 지역이다. 최고 득표율은 ‘정치 밭’이 좋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표밭을 열심히 갈았으니 그 영광도 가능하지 않았겠는가.
부산에서 3선 중진이 된 하 의원은 내년 4월 총선에서 자기 지역구 공천만 받으면 무난하게 당선될 것으로 보였다. 그런 정치인이 서울 출마를 선언했다. "수도권 승리의 밀알이 되고자 하는 충심 때문이다." 10월7일 서울 출사표는 여의도 정가를 흔들었다. "매우 고무적" "살신성인의 정신"…. 여당 지도부는 찬사를 이어갔다.
하 의원 선택은 여야 험지 출마론의 불을 댕겼다. 여당은 총선을 앞두고 정치 명분 싸움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다. 더불어민주당은 크게 한 방 얻어맞았다. 두 달 가까이 이어진 ‘하태경의 시간’. 정치 희생과 결단의 아이콘으로 인식됐던 그의 처지는 최근에 바뀌었다.
하 의원이 지목한 출마 지역구는 ‘정치 1번지’ 서울 종로다. 종로는 여당 소속인 최재형 의원 지역구다. 다선 의원이 여당 초선 의원 지역구를 넘보는 상황이 돼 버렸다.
하 의원은 "한 치의 주저함 없이 몸을 던진다"고 했지만 여당에서는 부적절한 처신이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보는 이를 당황하게 하는 급반전이다. 하 의원은 한동훈 법무부 장관 출마설이 나올 때는 종로가 험지라더니 자기가 출마하면 험지가 아니냐고 반박했다.
그런 모습을 보일수록 체면만 손상될 뿐이다. 정치의 감동은 설득의 영역이 아니지 않은가. 자기의 선택을 희생적인 결단으로 포장하는 모습 자체가 민망한 장면이다.
하 의원 처지가 바뀐 이유는 험지 출마의 역설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정치인 기득권 포기는 의지를 밝히는 그때가 가장 빛나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찬사가 뒤따를 때만 해도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겠지만, 정치 현실과 마주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누가 봐도 험지로 인식될 곳으로 가지 않는다면 하 의원 사례처럼 역공에 휘말릴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역 의원 험지 출마는 양날의 검이다. 의원이 지역구를 떠나는 선택은 자기를 믿고 지지했던 기존 지역구 유권자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다. 옮겨 가려는 지역구에서 총선 출마를 준비하던 다른 정치인에게는 날벼락 같은 상황이다. 어떤 의원이 지역구를 옮겨서 당에 공천을 요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다른 이가 다져놓은 표밭에 무임승차하는 선택이 될 수 있다.
정치인 험지 출마에 고도의 정치력이 요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기를 국회의원으로 뽑아줬던 기존 지역구 유권자 상심을 다독이고, 옮기려는 지역구에서 활동하는 정치인의 이해를 구하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그 과정은 생각보다 험난할 수도 있다. 험지 출마 주장이 희생은커녕 욕심으로 비칠 수 있다는 얘기다.
제22대 총선을 앞두고 지역구를 옮기려는 현역 의원이 또 있다면 험지 출마의 역설에 관해 곱씹어 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