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원기자
박유진기자
"우리 정부의 재정 운용 기조는 건전재정입니다."(윤석열 대통령 10월31일 국회 시정연설)
"가계부채는 잘 관리해야 하는 대상입니다."(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 10월29일 고위 당정대 협의회)
정부가 한국 경제의 고질적인 문제로 꼽히는 '부채 감축'에 팔을 걷어붙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건전 재정을 재차 강조하며 정부지출 구조조정에 나서겠다고 말했고,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도 최근 "가계부채 문제가 터지면 외환위기의 몇십배 위력이 될 것"이라면서 적극적으로 관리하겠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정부가 가계부채와 국가부채란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겠단 의지를 드러낸 셈이다.
하지만 부채 감축은 필연적으로 소비, 투자, 경기 위축을 동반하는 만큼 시장과 학계에선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한국 경제는 최근 성장률이 1~2%대로 크게 하락했기 때문에 부채 감축이 내수와 고용, 성장을 더 끌어내릴 가능성도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부채 감축 시도가 정치적 구호에만 그치지 않으려면 성장·분배를 고려한 중장기적 거시경제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1일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01.5%, 국가부채 비율은 47.3%다. 미국, 일본 등 주요 선진국과 비교하면 가계부채 비율은 매우 높은 반면, 국가부채 비율은 낮은 편이다. 미국은 가계부채가 73.6%, 국가부채가 103.6%이고, 일본은 가계부채 68.1%, 국가부채 231.8%다. 선진국 평균도 각각 73.4%, 104.9%로 국가부채 비율이 더 높다.
토머스 헬브링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 부국장도 최근 아태 지역 경제전망 기자간담회에서 "현재 한국의 국가 채무 수준은 적정하다"면서도 가계부채 비율에 대해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상위 그룹 가운데서도 높기 때문에 정책 수립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는 그동안 한국 정부가 정부부채보다 가계부채에 의존한 경제 성장 방식을 주로 사용해왔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정부는 가계부채보단 정부 재정 건전성 강화에 더욱 무게를 두고 있다. 지난해 초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지난 정부의 확장적 재정정책으로 건전성 우려가 커진 만큼 지출 구조조정에 나서겠다는 계획을 밝혔고, 실제 기획재정부는 내년도 예산안을 2005년 이후 가장 낮은 증가율(2.8%)을 적용한 639조원으로 편성하면서 연구·개발(R&D) 등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앞으로 고령화, 저출산 등 영향으로 국가 재정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큰 것을 고려하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한 부채 관리가 필요하지만, 문제는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가계 소비나 투자, 수출 등 다른 부문의 상황도 좋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수출은 올해 8월까지 12개월 연속 전년 동월 대비 감소했고, 또 다른 성장 축인 민간소비도 고금리 영향으로 지난해부터 저조한 모습을 보이는 중이다.
지난 수십년간 부동산 관련 부채로 성장을 유지해온 중국도 상황이 비슷하다. 중국은 과도한 건설·인프라 투자로 지방정부·기업부채 비율이 크게 높아지자 2016년 부채감축 정책을 도입했지만 이로 인해 성장률이 하락하자 다시 재정을 푸는 등 갈지자 행보를 보였다. 최근에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긴축 기조로 인해 헝다, 비구이위안 등 대형 부동산 개발 업체의 디폴트 위기가 불거지고, 디플레이션 우려까지 나오자 1조 위안(약 184조원) 규모의 국채를 발행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며 부분 완화 기조로 돌아섰다.
이는 그만큼 부채 관리와 경기 부양을 동시에 이뤄내기 힘들다는 뜻이다. 우리 정부 역시 '작은 정부'를 지양하며 감세 정책을 추진하고 국채 발행을 하지 않고 있으나 막상 세수가 부족하자 한은 일시 차입금을 113조원으로 늘리고, 환율 방어에 사용하는 외국환평형기금에서도 20조원을 끌어다 쓰기로 했다. 수치상으로는 모두 국가채무에 잡히지 않지만 결국 국가가 갚아야 할 돈이란 점에서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 때문에 학계 일각에선 보다 유연한 재정 정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는 빚을 내더라도 비교적 오래 버틸 수 있기 때문에 보통 디레버리징(부채 감축)은 가계-기업-정부 순서로 이뤄진다"며 "그런데 우리나라는 정부부터 디레버리징을 하고 가계부채는 더 늘어나는 형국이라서 이례적인 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손종칠 한국외대 경제학부 교수도 "우리나라가 팬데믹 기간에 정부 지출을 늘리기는 했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많은 편은 아니었다"며 "지금 수준에서 보면 한국의 GDP 대비 국가채무는 조금 더 늘릴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R&D 분야나 은퇴하는 베이비붐 세대를 위한 복지, 직업 재교육 등 필요한 곳에 지출하면서 추후 경제 성장률을 높이는 발판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학계에선 가계부채·정부부채 비율 자체보다도 잠재성장률 확대를 위한 노력이 우선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가계부채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인 아미르 수피 시카고대학 교수는 지난 7월 전미경제학회(NBER)에 기고한 논문에서 "잠재성장률이 낮아지면 고성장을 통한 디레버리징 가능성이 작아져 경제의 부채 역학이 악화될 위험이 있다"며 "이로 인해 정책 절충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미국의 경우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으면서 성장률을 비교적 높게 유지하고 있지만 재정적자 구조가 심해져 국채 이자율이 오르고 신용등급이 하락하는 등의 부작용을 겪고 있는 만큼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다. 최근 정치권에서도 여당은 건전 재정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야당은 정부지출을 더 늘려 복지와 성장에 사용해야 한다며 맞서고 있으나 절충점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기 때문에 대규모 재정적자를 통해 경기를 부양하자는 야당 주장도 맞지 않지만 세금을 깎아주면서 재정건전성을 확보하겠다는 정부 방향성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며 "근본적으로는 장기적인 성장을 유지하기 위해선 부채 문제를 적절하게 관리하면서 한계에 도달한 산업 구조 전환을 통해 제조업 위기를 극복하는 정책들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