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원기자
박유진기자
우리나라의 과도한 가계부채가 소비, 투자, 성장 등 경제 전반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가계부채 문제가 당장 대규모 금융위기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조금씩 은행권 부실을 키우고, 고용·자원배분 부문의 효율성을 낮추면서 '조용한 금융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대통령실과 정부는 가계부채를 둘러싼 우려가 빗발치자 뒤늦게 대책 마련에 나섰으나, 전문가들은 그동안 역대 정부가 부동산과 가계대출에 의존해 성장해온 관행 자체를 뜯어고치지 않는 한, 눈에 띄는 변화를 만들어 내긴 힘들 것으로 내다봤다.
31일 한국은행과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올해 2분기 기준 101.7%로 세계 최상위권 수준이다. 최고점을 찍었던 2021년 3분기(105.7%)에 비하면 소폭 낮아졌지만, 이는 지난해 급격한 기준금리 인상으로 인한 일시적 가계부채 감소와 올해부터 적용된 국제회계기준 변경(보험약관 대출을 가계대출에서 제외) 효과인 만큼 큰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다.
실제 한은이 집계한 GDP 대비 가계신용의 장기추세 비율은 올해 2분기 106.3%로, 2021년 3분기(101.4%) 이후 한차례의 하락 없이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가계부채가 과도하게 늘어나는 트렌드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는 의미다. 오히려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올해 1분기(101.5%)보다 2분기(101.7%)에 더 높아졌고, 이달에도 5대 시중은행의 가계대출이 2조4724억원 급증한 만큼 앞으로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더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
학계에선 이같은 가계부채 문제가 조용히 더 큰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매튜 바론 코넬대 교수와 에밀 베르너 메사추세츠공대(MIT) 교수, 웨이 시옹 프린스턴대 교수는 2020년 전미경제학회(NBER)에 기고한 논문(BANKING CRISES WITHOUT PANICS)에서 부채 문제로 은행 자본이 줄면 금융위기와 같은 패닉 없이도 경제에 상당한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조용한 금융위기' 가능성을 경고한 바 있다.
논문은 "은행 자본 경색은 공황 없이도 그 자체로 소비와 투자를 위축시키는 신용 공급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역사적으로 공황 없는 은행 부실 사태는 꽤 흔하게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아직 금융시스템이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최근 은행권 연체율이 높아지고 새마을금고와 저축은행,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의 부실 우려도 계속 제기되고 있어 안심할 수 없다. 금융감독원이 최근 발표한 8월 말 국내은행의 원화 대출 연체율은 0.43%로 3년 반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강경훈 동국대 경영학부 교수는 "아직 은행들의 자본 수준은 괜찮은 수준이나 금융권 전반적으로 연체율이 빠르게 오르고 일부 심각한 부문도 있어서 앞으로 '조용한 금융위기'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며 "지금은 새마을금고 등 일부 부실이 정부 지원에 가려진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레고랜드 사태'와 올해 새마을금고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 사태가 터지자 정부는 은행권 부실을 막기 위해 부동산 규제를 풀었고, 한은도 대출제도까지 개편하면서 지원했는데, 이런 노력에 부실이 감춰져 있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논문도 한국을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조용한 위기' 동안에는 정부의 개입이 숨겨져 있고, 다른 은행의 부실이 없어 채권자들에게 은행 부문이 건전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은행에 손실이 발생하면 신용 조건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유럽 등 주요국과 달리 우리나라 가계부채가 디레버리징(부채 축소) 없이 꾸준히 늘어난 데에는 부동산과 가계대출에 의존한 경제 성장 방식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실제 역대 정부는 경기를 살리기 위해 부동산 시장 부양책을 주로 사용해왔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다른 나라들은 대부분 가계부채를 줄이고 정부가 빚을 떠안는 추세였는데, 우리나라는 정부 대신 가계가 주로 빚을 늘리는 방식으로 간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로 침체된 부동산 경기를 살리기 위한 규제 완화에 주력했는데, 특히 박근혜 정부는 소위 '빚내서 집 사라'는 정책 기조까지 내세우며 주택담보대출·전세자금대출 활성화에 기여했다. 문재인 정부는 전 세계적인 저금리와 유동성 확대 속에 치솟는 집값을 막기 위해 부동산 관련 규제를 크게 강화하긴 했지만, 부작용으로 집값이 더 올라 오히려 가계대출을 폭증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에는 기준금리가 오르면서 집값 상승세가 꺾이고 가계대출도 소폭 줄었으나, 이로 인해 금융시장 불안이 커지자 곧바로 부동산 대출 규제를 풀고, 저금리의 특례보금자리론을 도입하면서 다시 부동산 경기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계부채 문제가 심각해지자 최근 정부는 규제를 죄이겠다는 방침을 밝혔으나, 추후 경기가 불안해지면 또다시 정부가 부동산 규제를 완화하는 '갈지자' 행보를 보일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이같은 정부의 부동산 의존으로 2010년 이후 우리나라 주택시가총액은 3019조원에서 6209조원으로 2.05배 급증했다. 같은 기간 주식시가총액(1.55배)이나 명목 GDP(1.63배)보다 훨씬 빠른 증가폭이다. 지난 십수년간 수도권을 중심으로 주택이 단순히 주거 공간이 아닌 투자 자산 역할을 하면서 매매·전세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이는 '갭투자(전세 끼고 매입)',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음)' 열풍과 함께 지금의 '부동산 공화국'을 만드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런 정부 기조와 가계부채 증가세는 학계에서도 연구 대상이다. '빚으로 지은 집' 저자인 세계적 석학 아미르 수피 시카고대 교수는 지난 7월 발표한 논문(HOUSING, HOUSEHOLD DEBT, AND THE BUSINESS CYCLE)에서 부동산에 묶인 한국과 중국의 가계부채 문제를 콕 집어 지적했다. 수피 교수는 "한국은 주택 호황기 가계부채 이자율이 지속해서 낮은 수준을 유지했고, 은행의 요건도 기업 대출보다 훨씬 낮았다"며 "이는 주택담보대출 증가를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됐고 또 전세대출이라는 독특한 금융상품의 확대로 이어지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1980년부터 2015년까지 16개국의 표본을 조사한 결과 가계부채의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이 크게 상승하기 시작할 때, 가계부채 붐이 가장 위험한 지점에 도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이는 "한국에 특히 걱정스러운 일"이라고 강조했다. 한은에 따르면 현재 규제 상한선인 DSR 40% 이상인 가구의 비중은 2017년 28.9%에서 지난해 31.9%로 급증했다. 수피 교수는 "DSR이 상승하면 실질 GDP 성장률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금리상승이 가계 지출 감소로 전이되는지 여부는 향후 한국의 GDP 성장률을 평가하기 위해 모니터링해야 할 핵심 요소"라고 했다.
이처럼 부동산을 통한 인위적인 경기 부양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가계부채가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원금과 이자 상환 부담 확대로 내수가 위축돼 금리 인상 시 경기 침체 위험이 커진다"며 "자금이 어느 정도는 기업으로 투자돼 우리나라 미래 성장 동력으로 역할 해야 하는데, 부동산 시장으로 쏠리면 경제 성장 잠재력을 깎아 먹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