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현기자
"숙식을 제공해주세요." 지난 6월23일 저녁, 서울 중구 명동성당을 찾아온 A씨(25·남)가 다짜고짜 이같이 말했다. 성당 근무자가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A씨는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 기도를 시작했다. 그 순간 A씨는 분노가 차올랐다. '상황이 힘들고 세상이 원망스럽다'는 생각이 든 그는 급기야 성당에 불을 질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A씨는 성당 지하로 내려갔다. 그는 갖고 있던 노트를 6장 찢어 라이터로 불을 붙인 뒤 나무로 지어진 지하 소성당 출입문 밑으로 밀어 넣었다. 1898년 건립돼 1977년 문화재(사적 제258호)로 지정된 명동성당의 지하 소성당은 기해·병인박해 당시 순교자 등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다. 다행히 사건 당일 미사를 마치고 지하 소성당 앞을 지나가던 신부가 불이 붙은 종이를 발견했다. 신부가 발로 밟아 불을 끈 덕분에 불길은 지하 소성당 출입문과 바닥 일부만 태웠을 뿐 명동성당 전체로 옮겨붙지 않았다.
검찰은 "국가지정 문화재이자 미사를 드리는 신부와 관리자, 여러 교인과 관광객들이 수시로 출입하는 명동성당을 불태워 없애려다 미수에 그쳤다"며 A씨를 현존건조물방화미수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형법에 따르면 불을 놓아 사람이 주거로 사용하거나 사람이 있는 건물과 기차, 전차, 자동차, 선박, 항공기 등을 불태운 사람은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 미수범의 경우 재판부의 판단에 따라 이보다 형량이 줄어들 수 있다. 이 사건으로 2개월간 구금 생활을 한 A씨는 법정에서 자신의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 명동성당 측은 A씨의 처벌을 원하지 않고, 선처해주길 바란다는 입장을 재판부에 전했다.
3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33부(재판장 김동현)는 A씨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보호관찰명령도 내렸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불을 놓아 손상하려고 한 명동성당은 성인과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한 주요 예배공간으로서, 여러 사람이 수시로 드나들며 기도와 예배를 드리는 장소"라며 "이 같은 장소에 방화를 시도한 피고인의 범행은 그 위험성을 볼 때 죄질이 매우 나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다소 우발적으로 범행에 이르렀고, 다행히 범행이 미수에 그쳤다. 피해자 명동성당 측과 피고인의 가족이 선처를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A씨의 어머니와 친척이 계도를 다짐하는 점, A씨가 2개월가량 구금돼 있었던 점 등을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했다. A씨와 검사가 항소하지 않으면서 1심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