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정기자
"고소득층을 중심으로 명품 소비가 늘고 있어요. 과거 장기간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하락)을 경험한 일본인들은 소비를 미루는 경향이 강했지만 최근에는 명품 가격이 오르기 전에 미리 소비하자는 분위기가 생겼습니다."
일본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일본 전문가 이지평 한국외대 특임교수는 최근 달라진 일본의 소비 패턴에 주목했다. 이 교수는 "나중에 소비하기를 선호했던 일본의 소비자들이 요즘에는 미리 소비하고 있다"면서 "고소득층이 소비를 더이상 미루지 않고 오히려 앞서 사려는 성향이 생긴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라고 전했다.
최근 일본인들의 소비가 회복 조짐을 보이는 데 더해 외국인 관광객들이 몰려오면서 소비가 더욱 살아나고 있다는 평가다. 역대급 엔저를 무기로 외국인 관광객들이 일본으로 몰려들면서 소비 시장을 달구고 있다. 실제 지난달부터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3년 반 만에 들어오면서 명품 판매가 급증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일본 5대 백화점의 8월 매출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두 자릿수 이상 증가했다. 한큐·한신백화점(23.8%), 미츠코시 이세탄(21.1%) 등의 8월 매출액이 전년 동기 대비 훌쩍 뛰었다.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지난 8일 장중 한때 1달러당 147.87엔까지 상승했다. 이는 지난해 11월 이후 10개월 만의 최고 수준이자 올해 들어 최고치다. 일본 정부가 이례적으로 구두개입에 나서며 시장에 긴장감을 불어넣었지만 엔화 약세는 멈추지 않고 있다.
한국 관광객들의 일본 방문도 줄을 잇고 있다. 최근 일본 여행에서 나이키 운동화와 디젤 청바지를 구입한 20대 김남훈씨는 "일본의 경우 국내에 들어오지 않는 모델이 많은 편인데, 엔저까지 겹치면서 한국에서 직구하는 것보다 수만원은 아낄 수 있었다"면서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저절로 면세가 된 기분에 평소 사고 싶었던 물품을 싹쓸이해왔다"고 귀띔했다. 9살 아이를 둔 주부 박소은씨는 "영국 런던에 이어 전세계에서 두 번째로 도쿄에 해리포터 스튜디오가 지난 6월 오픈했는데, 해리포터 광인 아이와 함께 추석연휴에 다녀오려 한다"며 "엔화가 낮아 여행 부담을 덜었다"고 말했다.
올해 일본이 코로나19 엔데믹 선언 이후 소비가 회복되면서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내수 비중이 큰 일본 경제의 특성상 소비가 빠른 회복을 도우면서 예상치를 상회하는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 내각부에 따르면 올해 2분기(4~6월) 일본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계절조정치)은 전 분기보다 1.2% 증가했는데, 이는 0.6%였던 2분기 한국의 GDP 성장률의 2배에 달한다. 올해 1분기도 일본은 0.9% 성장해 0.3%였던 한국 성장률을 앞섰는데, 현 추세라면 한국의 연간 성장률도 25년 만에 일본에 역전당할 우려가 커졌다. 한국의 성장률이 일본에 뒤진 것은 지난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처음이다.
이 교수는 "일본경제는 2014~2020년까지 실질GDP 성장률이 0~1%대에 그쳤으나 2023년 2분기 연율 기준 4.8%의 성장률을 기록했다"며 "지난해 4분기부터 지속되고 있는 3분기 연속 플러스 성장세가 올해도 유지, 한국의 성장률이 일본에 역전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특히 3%대를 초과하는 일본의 소비자물가와 임금상승률 추이는 일본 경제의 디플레이션 압력이 후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분석이다. 한국은행 도쿄사무소에 따르면 일본의 올해 봄철 임금 협상인 춘투(春鬪) 타결 임금인상률은 3.58%로 1993년 이후 30년 만에 최고 수준을 나타냈다. 유니클로 모기업인 퍼스트리테일링은 대졸 신입사원의 월급을 25만5000엔에서 30만엔으로 인상하고, 일본생명보험은 영업직원 5만명의 임금을 7% 인상할 방침을 제시했다. 오랜 기간 디플레에 빠졌던 일본 정부는 물가와 임금의 상승으로 인한 소비 확대 선순환을 기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김태경 한은 아태경제팀장은 "중산층 임금을 올리면서 소비 양극화를 막고, 소비 저변을 넓히려는 정책을 정부가 적극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해부터 꾸준히 상승해 올해 초 4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데 이어 근원물가(신선식품·에너지 제외) 상승률의 오름세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8월 일본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3%로 일본은행의 2% 목표를 초과한 상황이다. 일본은행은 일시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는 입장이지만 일본 물가가 다시 과거와 같이 0% 내지 마이너스로 빠질 가능성은 적다는 게 중론이다. 향후 물가 전망에 대해 한은은 "올해 들어 일본경제 회복에 따른 수요측 인플레이션 압력의 지속여부가 향후 물가상승에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며 "임금상승은 소비자의 구매력을 증가시키는 한편 인건비 비중이 높은 서비스물가를 중심으로 비용상승에 따른 가격인상을 유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에는 국제원자재 가격 상승, 엔화 약세 심화로 수입물가가 급등하면서 물가상승에 공급요인이 크게 작용했으나 올해 들어서는 수요요인의 기여도가 공급요인보다 커지면서 일본 물가가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평가다.
김승현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일본동아시아팀 전문연구원은 "일본의 7월 소비지출 중 가정용 내구재·의류 등 생활과 밀접한 품목의 지출이 오랜만에 증가했고, 외식·오락 등 대면 서비스 쪽도 관광 등의 영향으로 지표가 개선된 점이 긍정적"이라면서 "2인 이상 세대의 소비지출이 아직 전년 동월 대비 -5%이기는 하지만 임금 인상을 계기로 가계 가처분소득이 증가하고 향후 소비증가로 이어질 수 있어 일본의 변화를 주시해야 할 시점"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