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정민기자
수많은 인파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대통령선거 유세에 나섰던 정치인. 그에게 기꺼이 한 표를 던지겠다고 마음을 다진 유권자들. 대선이 열리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것인지 궁금증이 커졌던 시간. 하지만 ‘의문의 죽음’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유력 대선 후보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목숨을 잃은 사건. 정치 후진국에서 벌어진 사건일까. 아니면 정치 관련 소설의 한 장면일까. 이는 대한민국 정치 역사에 깊이 각인된 우리의 역사다.
1956년 5월15일 제3대 대선을 앞두고 벌어졌던 사건이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국민에게 충격을 전한 인물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던 해공 신익희 선생이다. 정치인 신익희는 임시정부에서 내무차장, 외무차장 등을 역임했다.
정치인 신익희는 제헌국회 부의장이자 제2대 국회의장을 지낸 정치 거물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부에 맞서 대선 출마를 준비했고, 1956년 제3대 대선에서 정치 인생의 정점을 찍고자 했다.
1956년 5월3일 오후 한강 백사장에서 열렸던 서울 유세는 ‘인산인해’라는 말을 현실로 만들어놓은 자리였다. 당시 서울의 인구를 고려할 때 상상도 하기 어려운 수십만 명의 인파가 신익희 대선후보의 유세장을 찾았다.
한국 정치사에서 유세의 명장면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게 바로 1956년 5월3일 한강 백사장 유세다.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신익희를 향한 뜨거운 민심은 대선 판도를 흔들어 놓을 수 있을 정도의 충격파를 안겼다.
5월15일 대선에 대한 관심은 증폭됐다. 정치인 신익희는 자유당 정부를 넘어 새로운 정부를 창출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부가 권력을 이어갈까.
국민적인 관심이 뜨거워지던 시점에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 한강 백사장 유세가 열린 지 이틀 후인 1956년 5월5일 정치인 신익희는 호남 지역 유세를 위해 열차에 올랐는데, 뇌내출혈로 인해 생을 마감했다.
정치인 신익희의 죽음은 대선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정치인 신익희의 유해가 서울역에 도착하자 군중들은 “사인을 규명하라”며 경무대 쪽으로 이동하려다 경찰과 충돌했다. 성난 시민들의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대선을 앞둔 시기에 일어난 유력 후보의 갑작스러운 죽음. 정치 음모론이 불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정치인 신익희에 관한 추모 열기와는 별도로 제3대 대선은 예정대로 치러졌다.
1956년 5월15일 제3대 대선은 자유당 이승만 후보의 당선으로 끝이 났다. 그해 대선은 당선자 확정과 무관하게 정치사에 각인될 또 다른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비처럼 쏟아졌던 무효표. 제3대 대선의 무효표는 역대급이었다.
참고로 가장 최근에 열린 지난해 제20대 대통령선거의 무효표는 30만 7542표다. 투표자 수의 100분의 1, 약 1% 수준의 무효표가 나왔다. 그런데 제3대 대선의 무효표는 185만 6818표에 달했다. 당시 투표수는 906만7063표였다. 투표수의 5분의 1, 약 20%의 무효표가 나온 셈이다.
서울의 경우 이승만 후보가 20만5353표를 받았는데, 무효표는 28만3459표에 달했다.
서울에서 대통령 당선인이 얻은 표보다 무효표가 더 많은 상황,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정치인 신익희를 추모하는 열기는 대선에서 무효표 행렬을 이끌었다.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기에 그에게 표를 던질 수는 없지만, 무효표를 행사함으로써 유권자의 정치적인 뜻을 전한 것이다.
제3대 대선은 이승만 후보의 득표율이 70%에 달할 정도로 싱겁게 끝이 났지만, 세부 내용을 뜯어본다면 당시 집권 여당이 긴장할 수밖에 없는 선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