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현기자
"피고인은 방치된 오피스텔에서 짐을 치워 창고에 보관해 뒀을 뿐이며, 피해자의 '주거의 평온'을 깨뜨렸다고 볼 수 없습니다."
몇 달씩 월세가 들어오지 않은 오피스텔에 들어가 짐을 치웠다가 형사 재판을 받게 된 관리인 A씨(49·여) 측의 호소다.
A씨는 서울 강남구의 모 오피스텔 관리 직원으로서 임대인을 대신해 세입자들에게 월세를 거두는 일을 해 왔다. 그는 2021년 4월7일 세입자 B씨가 살고 있던 10층의 한 호실에 보조키로 문을 열고 들어가 짐을 치웠다. 당시 B씨는 8개월간 월세를 미납한 상태였다.
B씨는 해당 오피스텔의 계약상 임차인은 아니었다. 원래 B씨의 지인 C씨가 2019년 말부터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178만원으로 계약을 체결한 뒤 3개월 단위로 임대차 계약을 갱신해온 곳이었다.
B씨는 C씨와 한달 반가량 함께 살다가 2020년 초부턴 C씨가 나가고 이곳에서 혼자 살기 시작했다. 월세는 B씨가 냈지만, 임차인 명의는 여전히 C씨로 유지됐다.
하지만 그해 9월부터 B씨는 돈을 내지 않았다. 짐을 그대로 둔 채 오피스텔을 비워 놓고 다른 곳에 나가 지냈다.
A씨는 2020년 10월부터 2021년 2월까지 "밀린 월세를 내라"고 B씨에게 지속적으로 문자를 보냈지만, B씨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A씨는 서류상 임차인 C씨에게 "미납한 월세를 안 내면 오피스텔을 방치하지 않겠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냈고, C씨는 "나도 B씨와 연락이 되지 않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면서 A씨에게 "오피스텔을 정리해 달라"는 답장을 보냈다.
결국 A씨는 그해 4월 오피스텔에서 짐을 정리했고, B씨는 5개월이 지난 2021년 9월 말 오피스텔에 돌아왔다. B씨는 "에르메스, 루이비통, 구찌 등 명품신발 40켤레와 명품 의류 50여벌, 차용증 등 합계 4000만원 상당의 물건이 사라졌다"며 "누군가 함부로 들어와 내 물건을 다 치운 뒤 팔아버린 것 같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검찰은 A씨에게 주거침입과 재물손괴 혐의를 적용해 재판에 넘겼다.
법정에서 A씨는 "오피스텔에 들어간 것은 맞지만, 당시 B씨에겐 법적으로 보호받을 점유권이 없었다. '침입'한다는 고의도 없었다"고 호소했다. 또한 "B씨와 검찰이 주장하는 명품 옷과 신발을 가져간 사실도 없다"고 주장했다.
8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5단독 박병곤 판사는 "검사가 낸 증거만으론 피고인에게 주거침입 및 재물손괴의 고의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증명되지 않는다"며 최근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계약상 명의자는 따로 있었지만, 오피스텔을 사용하고 돈을 낸 사람은 B씨였다"며 "B씨는 2020년 9월부터 돈을 내지 않았고 한 달 뒤엔 오피스텔을 나가 다른 곳에서 지냈다. 기록상 B씨는 사건 당일까지 오피스텔로 돌아오지도, A씨에게 연락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오피스텔은 보증금과 비교해 월세가 높으며, 3개월 단위의 '초단기 임대차' 용도로 쓰는 경우가 많고, 임차인들이 자유롭고 빈번하게 입실과 퇴실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이 같은 사정을 고려하면, 피고인으로선 B씨가 이미 퇴실했다고 생각했을 여지가 있고, 들어가 짐을 치운 행위가 이례적이거나 부당하지 않다"고 판시했다.
검사는 A씨에게 유죄가 선고돼야 한다며 항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