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기자
지난해 가을 어느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아파트 단지 내 나무 가지치기를 해야 하니 이동 주차를 부탁한다는 경비원의 연락이었다. 주차 후 안면 있던 그가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기자세요? 차량에 올려진 명함을 봤습니다". 그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젊은 시절 기자였거든요. 반가워서 말 걸어봤어요". 대화를 나눠보니 칠순 언저리로 보이던 경비원은 누구나 알만한 한 시사주간지 기자 출신이었다. 짧은 담소를 나눈 게 그에 대한 거의 마지막 기억이다. 올해 들어 그를 다시 보지 못했다.
지난 일이 떠오른 건 얼마 전 한 제보를 받으면서다. 서울 구로구의 한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는 지난 2월 청소용역 관리업체 A사에 재계약 의사를 밝혔다. 다만 근무 기간이 1년을 채워 연차가 발생하는 미화원들을 교체하라는 조건이었다. 교체 대상 미화원은 총 7명, 모두 60대였다. 결국 재계약은 불발됐고, 아파트 측은 새 관리업체 선정을 위한 입찰공고를 냈다. 공고에서 아파트 측이 A사에만 '연차수당 비용 책임' 조항을 내걸자 구로구청이 시정명령을 내리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A사와 다시 계약 시 기근무 중인 미화원 고용이 유지돼 연차가 발생하기 때문으로 읽힌다. 일견 부당해 보이지만 위법성은 없다. 비용을 최소화하는 합리적인 선택의 일환이다. 지자체와 고용노동부도 연차수당 등의 부담 주체는 상호 조율을 통해 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 노무사도 "갑질로 보이지만 위법은 아니다"라고 진단했다.
아파트 관리직 근로자들은 여러가지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 지난 19일엔 아파트 경비원에게 수년 동안 폭언과 갑질을 한 입주민이 1심에서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기도 했다. 현재 국회엔 아파트 갑질을 막기 위한 공동주택관리법 개정안이 발의돼있다. 경비원 등 근로자에게 부당한 명령을 한 입주자에게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것이 골자다.
대책 마련에 나선 것은 반갑지만, 입주자의 갑질 행위에 국한된다는 맹점이 있다. 아파트 근로자들은 욕설과 협박 못지않게 '고용 갑질'로도 고통받고 있다. 직접고용이나 규제 강화 필요성은 답이 아닐 것이다. 시장 경직성을 강화하고, 신규 구직자 진입이 차단되는 폐해가 우려된다. 다만 계약 갱신 여부 사전 예고나 관리업체가 바뀌더라도 고용승계를 인정해주는 등 최소한의 조례나 가이드라인 제공 등은 고려해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