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정민기자
미국의 ‘정치명문가’는 오랜 민주주의 역사의 전통과 권위를 상징한다. 대표적인 정치명문가로는 케네디 가문을 빼놓을 수 없다.
대통령을 비롯해 상원의원, 하원의원을 10명 가까이 배출했으니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하다. 대통령 2명을 비롯해 부통령, 주지사 등을 배출한 루스벨트 가문과 부자(父子) 대통령을 배출한 부시 가문도 정치 명문가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다.
정치명문가는 어린 시절부터 이른바 정치 수업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정치의 예절과 정치 역량, 공직자의 덕목 등을 배울 수 있으니 준비된 정치인이라 할 만하다. 정치 명문가 인사들은 데뷔부터 후광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누구의 자녀 또는 누구의 손자-손녀라는 타이틀이 지닌 상징 효과다. 정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유리한 환경이다. 다만 정치 명문가 출신이 기대 이하의 정치를 할 경우 더 호된 비판을 경험할 수 있다.
한국에도 미국 케네디 가문과 같은 정치명문가가 나올 수 있을까. 국내의 정서를 고려할 때 고려할 사항이 있다. 한국에서는 미국처럼 전통과 권위의 측면에서 정치 명문가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이른바 ‘아빠 찬스’와 같은 부정적인 키워드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정치 명문가가 터전을 잡기 쉽지 않은 환경이다. 물론 정치적 역량이 부족한데 후광 효과 하나로 공직에 오른다면 비판을 받을 일이다. 하지만 누구의 자제라는 이유만으로 당사자의 능력 보유 여부와 무관하게 비판적으로 다가서는 것은 또 다른 색안경이 될 수 있다.
한국에서 정치명문가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이는 정대철 헌정회장 가문이다. 정대철 회장은 2000년 제16대 총선까지 다섯 차례 금배지를 달았던 5선 국회의원 출신이다. 1997년 대선 때는 정치 거물인 김대중 총재에 맞서 대선에 도전했을 정도로 선 굵은 정치를 펼쳤다.
정대철 회장은 부친인 정일형 전 외무장관과 국내 여성 최초 법조인인 모친 이태형 변호사의 아들로 더 유명하다. 정일형 전 장관은 8선 국회의원을 지낸 중진이다.
정대철 회장의 아들은 제19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호준 전 의원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에 이르기까지 3대가 국회의원을 지낸 셈이다.
여야 정치인 중에서 부친의 뒤를 이어 국회의원을 지낸 인물이 여럿 있다. 윤석열 정부의 실세로 불리는 장제원 국민의힘 의원의 부친은 장성만 전 의원이다. 장제원 의원은 부친의 뒤를 이어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현재 3선 의원이다.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낸 정진석 의원도 부친에 이어 국회의원이 된 사례다. 부친 정석모 전 의원은 충남 공주 등지에서 6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정진석 의원도 공주 등지에서 5선 국회의원을 이어가고 있다.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의 부친도 국회의원 출신이다. 부친 유수호 전 의원은 판사를 역임했으며, 재선 국회의원 출신이다. 유승민 전 의원은 5선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여권의 차기 대선주자 가운데 한 명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노웅래 의원과 김영호 의원 등이 부친의 대를 이어 국회의원을 하고 있다. 이들은 부친이 정치적으로 더 유명하다. 노웅래 의원 부친 노승환 전 의원은 5선 국회의원 출신이고, 민선 마포구청장을 두 차례 역임한 마포 정치의 역사다.
김영호 의원은 재선 국회의원이지만, 아직 아버지의 명성에 견주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부친 김상현 전 의원은 6선 의원 출신으로 1980~1990년대 한국 정치의 풍랑을 온몸으로 헤쳐나갔던 정치 거목이다.
미국과 비교할 때 민주주의 역사는 짧지만, 한국에도 정치 명문가로 불릴 만한 가문은 생겨나고 있다.
미국의 케네디 가문처럼 존경받는 정치 명문가가 되려면 결국 좋은 정치, 모범이 되는 정치를 하는 게 중요하다. 누구의 자제라는 후광 효과를 뛰어넘는 정치 자질과 역량을 선보여야 대중의 시선을 바꿀 수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