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은기자
미국, 중국에 이어 유럽연합(EU)이 역내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430억유로(약 62조원) 규모 반도체법에 합의했다. EU는 해당 법안을 통해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기존 9%에서 20%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18일(현지시간) 티에리 브르통 EU 내부시장 담당 집행위원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유럽의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반도체법 3자 협의가 최종 타결됐다고 밝혔다. 3자 협의는 EU 집행위원회와 회원국 27개국을 대표하는 이사회, 유럽의회가 모여, 신규 입법안 추진 시 세부 내용을 확정하는 가장 중요한 절차다. 반도체법은 향후 유럽의회와 이사회 각각의 승인 절차를 거친 후 표결을 거쳐 시행된다.
EU 집행위는 이 법안을 통해 첨단 반도체 공장과 함께, 구형 공정 생산 부문, 연구개발(R&D), 설계 부문 등 반도체 공급망 전반으로 지원을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반도체 법을 통한 지원은 국가 차원의 투자와 민간 투자를 결합해야 받을 수 있다. 지원 자금은 EU의 예산을 통해 조달된다.
EU는 코로나19 이후 글로벌 공급망 변화에 따라 자동차 생산에 타격을 입으면서 미국과 아시아에 대한 높은 반도체 의존도를 줄이고자 이 법안을 마련했다. EU 내에는 세계 최고 반도체 장비회사인 네덜란드의 ASML이 자리잡고 있다.
이로 인해 최첨단 반도체 생산에 있어 독점적 위치를 갖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지만, 정작 EU 내 반도체 생산량은 전 세계의 10%에 불과한 상황이다. EU 관계자는 주요 외신에 "지난해 반도체 법에 대한 계획이 발표된 이후 EU가 이미 1000억 유로(144조5190억원) 규모 공공·민간투자를 유치했다"고 밝혔다.
EU의 반도체 법 통과에 따라 각국의 반도체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경우 지난해 8월 미국에 세워진 반도체 공장에 보조금 100억달러 또는 최대 40%의 세액공제를 지원하는 반도체 지원법을 제정했다. 중국은 미국의 반도체 수출 통제압박에도 국가직접회로 산업투자펀드를 통해 자국 반도체 기업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중국의 파운드리 기업인 SMIC(중신궈지)와 시스템온칩 설계사 UNISOC(쯔광잔루이) 등이 국가 펀드의 지원을 토대로 성장한 기업들이다.
일각에서는 이 법의 통과에도 EU가 경쟁국과의 격차를 좁히는데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EU가 확보한 자금이 반도체 경쟁력을 전폭적으로 향상시키는 데는 턱없이 부족하고, 단순 지원 정책을 통해서만 시장 점유율을 키우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블룸버그는 "정치권과 전문가들은 EU가 조달한 430억유로로는 시장점유율을 20%까지 끌어올리기 역부족이라고 보고있다"고 밝혔다.
유럽의회의 수석 대표인 에바 메이델도 "(반도체법이) 시장점유율을 20%까지는 끌어올리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우리는 EU 시장을 매력적으로 만들 다른 요소들을 확실히 고민해봐야 한다"고 밝혔다.
EU가 시장 경쟁력 확보를 위해 지원금 지급 카드를 꺼내 든다면 자금 확보 여력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미국의 외교싱크탱크인 전략국제연구센터의 폴 트리올로 분석가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EU가 신경 써야 할 핵심 포인트는 업계를 지탱하는 반도체 공급망을 EU로 이전하려면 얼마나 큰 비용을 들여야 하는지 여부"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