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해영기자
싱가포르 중앙은행이 14일 통화긴축 정책을 깜짝 중단했다. 캐나다가 지난달 주요 7개국(G7) 중 처음으로 기준금리 인상을 중단한 뒤 호주, 싱가포르 등 각국이 긴축 사이클 종료에 나서고 있다.
싱가포르 중앙은행인 싱가포르통화청(MAS)은 이날 성명을 통해 싱가포르 달러의 명목실효환율(NEER)을 종전 수준으로 유지한다고 밝혔다. 싱가포르는 기준금리가 아닌 환율을 통해 통화정책을 관리하는데, 2021년 10월 이후 5차례 연속 통화긴축 스텝을 밟은 뒤 처음으로 긴축 기조를 멈춘 것이다.
MAS는 "세계 성장 위험 증가로 국내 경기침체가 예상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며 "물가 상승률은 여전히 높지만 5회 연속 통화긴축정책으로 상승세가 완화되고 있다. 긴축정책이 경제 전반에 걸쳐 효과를 내고 있고 인플레이션을 더욱 약화할 걸로 예상된다"고 긴축 중단의 배경을 설명했다.
이날 싱가포르 중앙은행의 긴축 사이클 종료는 시장에서도 예상치 못한 결정이다. 블룸버그 전문가 조사에 따르면 22명 중 12명은 MAS가 통화긴축 기조를 이어갈 것으로 봤다. 통화정책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점친 전문가들은 이보다 적은 10명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실시한 앞선 조사에서도 전문가 14명 중 9명이 긴축 지속을 예상했고, 5명만 통화정책을 유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싱가포르 통화당국이 시장의 예상을 깨고 긴축 기조를 멈춘 건 물가보다 경제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싱가포르 정부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경제성장률은 직전 분기 대비 0.7% 하락했다. 지난해 4분기(0.1%) 보다 0.8% 낮은 수준이다. 글로벌 상품·투자 교역 위축이 원인인데, 전망도 밝지 않다는 점이 문제다. MAS는 올해 싱가포르 경제성장률이 0.5~2.5%로 2022년(3.6%) 대비 대폭 둔화할 것으로 내다봤다. 최악의 경우 수출이 2% 감소하고 최상의 시나리오에서도 '제로(0) 성장'을 기록할 것이란 관측이다.
물가는 앞으로 몇 달간 높은 수준을 유지하다가 올 하반기 들어 눈에 띄게 둔화할 것으로 내다봤다. MAS는 올해 싱가포르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는 5.5~6.5%, 근원물가 상승률은 3.5~4.5%로 제시했다.
타마라 매스트 헨더슨 블룸버그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이코노미스트는 "싱가포르의 긴축 중단은 글로벌 경기의 급격한 침체를 대비한 것"이라며 "만약 근원물가가 MAS의 예상대로 하반기 상당히 둔화한다면 10월 통화정책 회의에서 '완화적인' 여건이 마련될 수 있다"고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