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종섭트렌드&위켄드 매니징에디터
세상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뀌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메타버스, 메타버스’ 하더니 어느새 시들해졌다는 뉴스가 나온다. 변화의 흐름이 어디를 강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부도, 기업도, 개인도 마찬가지다. 격변기에는 늘 새로운 싹이 움튼다.
염재호 전 고려대 총장은 이런 변화의 접점에 서있다. 그는 SK이사회 의장으로서 기업 현장을 경험하는 가운데 최근에는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는 ‘디지털신질서협의체’ 의장을 맡았다. 올 9월 개교를 목표로 하는 미래형 대학 ‘태재디지털대학(태재대학)’의 초대 총장으로도 동분서주하고 있다. 지난 3월 27일 서울 종로구 SK(주) 이사회 의장실에서 1시간 동안 그를 만났다.
최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만든 디지털신질서협의체의 의장을 맡았다. 왜 만들었고, 무슨 일을 하는 협의체인지 궁금하다.
21세기에 디지털 혁명이 일어나면서 삶이 바뀌었다.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과거를 돌이켜 보자. 20세기에 과학적 관리법에 의해 대량 생산, 대량 소비 체제가 만들어지면서 인류는 굉장히 풍요로워졌다. 하지만 그 결과 환경오염이나 쓰레기 등 여러 부정적인 문제가 생겼다. 사전에 이런 것에 대해 아무도 신경을 안 썼기 때문에 지금 그걸 해결하느라고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나.
그래서 디지털 혁명으로 인해 파생됐거나 향후 나타날 다양한 문제들을 사전에 정리를 좀 하자, 디지털 권리장전 같은 것을 만들자는 것이다. 디지털 격차나 인공지능과의 공존 문제 같은 것 말고도 개인들이 디지털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조심해야 할 것들, 예를 들면 보이스피싱이나 음란물, 해킹 등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룰 예정이다. 디지털신질서에 대한 기준이나 방향성을 한국이 주도할 때가 됐다.
디지털 질서와 관련해 일종의 세계 표준을 만들겠다는 뜻인가?
그렇다. 챗GPT 4.0이 나오면서 거짓 정보도 유통될 수 있고 남의 아이디어를 도용할 수도 있다. 디지털 신기술의 발달에 따라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영향이나 보완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선도적으로 기준을 만들 것이다.
예를 들면 새로운 신약을 만드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검증을 통과해야 인정을 받는다. 이처럼 디지털로 인해서 세상이 바뀔 때 문명사에 없던 새로운 질서, 권한, 이런 게 어떻게 나타날지를 연구하면서 한국이 흐름을 주도하자는 것이다. 20여 명의 전문가들이 모여 얘기를 시작했다.
핵심 포인트는 무엇인가?
처음에는 국민교육 헌장처럼 디지털 시대에 인류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큰 장전을 만들 계획이다. 그 후에 거기에 따라서 하나하나 여러 문제들을 바꿔 나가면 된다. 예를 들면 인간이 과연 결혼을 할 필요가 있을까, AI가 발전하면 자기를 더 즐겁게 해주는 사회가 될 수도 있는데-. 그랬을 때 과연 인간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또 챗GPT 때문에 교육의 개념이 뭐냐 하는 것들도 엄청나게 새롭게 고민해야 된다.
그런 문제가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지 않나?
전 세계적인 문제다. 그것을 미리 경고하고 주도해서 ‘다 와라, 여기서 한번 해보자’ 그런 걸 해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우리나라가 요즘 굉장히 용감해졌다. 드라마도, 음악도, 다 자신감이 생겼다. 이런 것 왜 우리가 못해? 디지털에서는 우리가 앞서 나가는데, 하는 자신감이 이렇게 표현됐다고 볼 수 있다.
당장의 현실적은 목표는 디지털 권리장전을 만드는 것인가?
맞다. 권리장전에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것, 우리가 이걸 위해서 뭘 해야 되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을 계획이다. 일단 그게 된다면 디지털 시대의 신질서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예측도 할 것이다. 이제는 통계청이 아니라 데이터청이 생겨야 된다. 통계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데이터들을 한 군데에 다 모으는 게 더 중요하다.
인간의 삶과 관련해 디지털 시대에 가장 달라지는 게 무엇일까.
아마 제일 크게 달라지는 게 일일 것이다. 어떤 것을 일이라고 규정하는가, 일이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참 답답하게 생각하는 게 지금 여야가 노동 시간 갖고 싸우고 있다. 노동시간은 20세기 대량 생산 제조업일 때 공장에 나가서 현장에서 일하는 것을 바탕으로 몇 시간이냐 따졌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노동 시간이라는 개념이 변했다. 그런데 아직도 정치권에서는 52시간이 맞냐, 60시간이 맞냐 하고 있다.
'우아한 형제들' 같은 경우는 한 달씩 유럽 가서 살면서도 인터넷에 접속해서 일을 다 한다. 디지털 시대이니 시간과 공간이 초월되는 건데 출퇴근에 시달리면서 일해야만 하는 이유가 뭔가. SK만 해도 그런 부분에서 많이 자유로워졌다. 정해진 자기 자리가 없다. 이번 주까지, 오늘 어디까지 일할 것인가만 컨트롤하면 된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정부가 나서서 ‘몇 시간 하면 벌을 준다’ 이러니 되게 우스운 것이다. 지금 시간 갖고 노동계와 싸울 때가 아니다.
다른 얘기를 좀 해보자. SK(주) 이사회 의장으로 일한 지 4년이 넘었다.
2019년부터 일했으니 5년째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혁신적으로 하는 이사회다. 최태원 회장이 거버넌스 개선을 위하여 이사회 의장 자리를 내려놓았고, 이사회를 거쳐 내가 의장에 선임되었다. 리스크 매니지먼트나 정치 경제적인 변화, 트렌드 이런 것을 큰 틀에서 논의하고 해마다 실험하면서 시스템을 새롭게 진화시켜 가고 있다. 재미 있고, 배우는 것도 많고, 보람도 있다.
어떤 측면에서 혁신적이라는 말인가.
전통적으로 보면 대기업 같은 경우 오너가 다 결정하거나, 아니면 소위 말하는 구조본이나 기획실 같은 데서 하는데 우리는 다르다. 이사회가 한다. 1776년 미국이 독립하기 전까지는 대통령제라는 게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다 왕이 했다. 조지 워싱턴 초대 미국 대통령이 연임 한 번 하고서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사람들이 그런 게 어딨냐며 이해를 못했다. 그게 그때는 너무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지금은 다 그렇게 됐다.
최 회장은 철학이나 가치, 시스템 중심으로 가야 글로벌 기업이 되는 것이지 언제나 오너 중심으로 가는 것은 글로벌 거버넌스가 아니라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다. 그런 면에서 계속 실험하듯이 하는 것이고 이사회에 권한을 많이 주고 있다.
최 회장이 이사회 의장을 맡아달라면서 강조했던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이사회 중심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삼권분립처럼 이사회와 주주 그리고 경영진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얼마나 잘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따로, 또 같이도 중요하다고 했다. 각 회사들은 자율적으로 일을 하지만 SK의 가치나 비전은 공유하는 식이다. SK에는 각 회사 대표들이 모여가지고 서로 조정하고 협의하는 SUPEX추구협의회가 있다.
실제로 이사회가 자율적으로, 이상적으로 잘 운영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나.
100%는 아니지만 처음에는 나도 회장과 논의하면서 ‘회장이 갖고 있는 생각이 있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몇 번 해봤더니 회장께서도 자신이 전지전능한 게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지 좀 체크를 해주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
자신이 결정해서 잘못되면 책임을 지면 되지 항상 회장한테 모든 걸 결정하게 하면 되겠나. 회장이 어떻게 다 하는가, 이렇게 큰 회사인데. 지금 그런 방향으로 운영이 되고 있다. 이사회가 CEO 평가도 하고 연봉 같은 것도 컨트롤 한다. 워크숍도 많이 하고 교육도 받고 한다. 지난해에만 50여 차례 했던 것 같다. 이런 식으로 계속 바꿔 가고 있다.
이사회와 최고경영자의 바람직한 관계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기업 경영과 관련해)제일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게 오너다. 그러니 오너들은 똑똑할 수밖에 없다. 10년, 20년 하게 되면 매일매일 엑기스 과외를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늘 제왕처럼 결정하기보다는 오너가 놓치는 부분을 이사회에서 얘기해 주는 게 더 좋을 수 있다. 올라오는 게 다 맞는 건 아니니까, 이사회가 반대 의견도 표명하는 등 균형을 갖는 게 의미가 있다.
기업 오너 중에는 아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 않나.
변화해 가는 과정이다. 기업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대개 자기 혼자 90%를 떠드는 게 정치인들이라고 하지 않나. 기업이든 정치든 사회가 선진화해 가는 과정에 있다.
사외이사에 여성들이 진출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성들이 능력이 있는데도 그런 것을 고려 대상으로 삼는 게 부족했다. 계속 찾고 발굴하는 상황이다. SK의 경우 사외이사 5명 중 두 명이 여성이다. 이들은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능력 때문에 됐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분들을 모신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의무 할당제를 전면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여성 비율이 너무 낮으니까 그렇게 얘기하지만 아마 한 10년쯤 지나면 남성 할당제가 될지도 모른다. 왜냐면 지금 일부 정부 부처 같은 경우 본부의 70~80%가 여성이다.
굳이 성을 구별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여성들에게 소위 말하는 유리천장이 있다고 생각해 그런 건데 SK 임원들의 경우도 여성들이 약진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남녀 성 구분 없이 능력 중심의 그런 문화를 만드는 것이 오히려 더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이행기니까 할당제를 고려할 필요는 있다.
‘경영자 최태원’을 평가한다면?
미래 지향적이면서 뭔가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바둑에서 포석을 두듯이 10~20년 이후를 보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지금 엄청나게 올라와 있는데 그대로 있다가는 떨어지니까,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미래 전략을 취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크다. 인간적으로는 솔직하고 소탈하다.
태재대학 상황은 어떤가. 올 3월에 개교하겠다고 했었는데.
준비가 좀 부족해서 교육부가 보완을 요청했다.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한다. 더 단단하게 준비해서 9월에 개교 할 생각이다. 9월 개교는 우리나라 최초이기에 상징성도 있다.
캠퍼스가 별도로 있는 건 아니지 않나.
21세기형 대학이다. 기존 사이버 대학은 그냥 교수가 강의하는 걸 영상으로 찍어서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하는, 대량 교육 시스템이다. 태재대학은 디지털을 이용해 학생이나 교수가 전 세계 어디에 있든 수업을 할 수 있다. 수업 시간에는 문제 중심으로 토론만 한다. 여태까지는 교수가 교과서로 가르쳤지만 태재대학에서는 교수가 가르치지 않는다. 그래서 교수도 12주 동안 교육을 받는다. 21세기 관점에서 보면 가르친다는 것도 우스운 것이다.
모든 반이 20명 이하인데 1년 내내 개인적 능력 세 가지(자기 주도력, 비판력, 창조력)와 사회적인 능력 세 가지(소통력, 공감력, 지속가능성)를 학습한다. 자기 전공을 깊이 파는 것은 대학원에 가서 하면 되고 대학에서는 기초 체력, 문제 해결 능력을 만들 수 있는 근력을 키워줘야 한다. 2학년 2학기부터 4학년 1학기까지 네 학기는 일본 미국 중국 러시아에서 생활한다. 6개월 동안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그 나라들이 어떻게 강국이 됐는지를 파악하면서 전공을 공부한다. 전공에는 4개의 학부가 있는데 일곱 과목만 들으면 전공으로 인정해 준다.
학생들은 뽑았나.
5월부터 한국 학생 100명, 외국 학생 100명을 뽑는다. 21세기에 새로운 모델이기 때문에 다른 대학들도 이것을 일부 받아다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수업료가 비쌀 것 같다.
한샘 창업자인 조창걸 전 명예회장께서 이사장으로서 3천억원을 투자해서 한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부담을 많이 느끼거나 부유층만 학생이 될 수 있다거나 이런 건 전혀 아니다. 10년 정도는 재정적 어려움 없이 할 수 있겠지만 안정적으로 가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지식이 산업이 될 수 있다. 기업을 대상으로 해 교육 과목을 팔기도 하고, 지식 정보를 단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큐레이팅을 한 디지털라이브러리를 활용할 생각도 갖고 있다.
돈이 많이 들지 않는다. 전 세계의 교수들을 뽑아서 쓰는데 그들이 여기 오지 않아도 된다. 정년도 없다. 미국도 지난해에 이미 조지아주립대학이 정년을 없앴다. 이미 노마드 유목 민족의 사회로 가는데 우리는 한 번 들어오면 직장 보장해달라는 것은 양반제를 보장해달라는 것과 똑같다. 그것은 신분제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귀족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냈으니 교육에 대한 생각이 남다를 것 같다.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나.
한국은 아직도 입시 중심으로 돼 있기 때문에 공부를 노동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호기심을 갖고 궁금해서 하는 게 공부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재능을 얼마나 많이 끌어내는가가 교육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다. 우리는 집어넣는 것만 생각한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도록 해야지 다른 사람의 메아리가 되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얘기를 안 한다. 자신이 맛있다고 느꼈는데도 ‘맛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기업에서도 학벌 중심의 채용 같은 것은 없어져야 한다. 지금은 학벌보다 사실 창의적이고 아이디어가 중시되는 시대다. 학위로 뽑지 말고 능력을 보고 뽑아야 한다. 21세기를 살고 있는데 우리는 20세기 소셜DNA를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20세기 관점에서 보니까 문제를 풀지 못한다. 노동시간 갖고 싸우는 정치권이 참 한심하다고 한 건 이런 맥락이다.
[염재호는 누구인가]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신일고 , 고려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1990년 부터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외교통상부 정책자문위원장, 서울시 산학협력포럼 회장, 한일미래포럼 대표, 기획재정부 공공기관 경영평가단장, 한국고등교육재단 이사장과 한국정책학회 회장, 현대일본학회 회장을 지냈다. 2015~2019년 제19대 고려대 총장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는 <개척하는 지성>(2018, 나남), <現代韓國の市民社會と利益團體>(2004, 東京: 木鐸社), <일본 과학기술개발의 네트워크화 현황과 전망>(1997), <딜레마 이론>(1994) 등이 있다. 현재 SK㈜ 이사회 의장, 디지털신질서협의체 의장, 태재대학 총장 등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