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수기자
우리나라는 정보통신(IT)·반도체 강국을 자부한다. 그런데도 4차 산업혁명 시대 기본 인프라인 슈퍼컴퓨터를 자급자족하지 못한다. 올해 진행될 국가 슈퍼컴퓨터 6호기 도입도 외국 업체들만 판치고 있다. 국내 수요가 부족한 상황에서 독자적인 산업·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챗GPT를 대표로 한 초거대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자율주행 등 갈수록 데이터 처리 속도·용량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중국 기술패권 경쟁과 공급망 재편 등 세계경제는 블록화하고 있다. 급증하는 국내 수요에 대응하는 것은 물론, 국가 안보적 차원에서도 슈퍼컴퓨터 국산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초고성능 컴퓨터(high performance computer·HPC)는 수백 대 이상의 고성능 컴퓨터를 고속 상호연결망으로 연결한 물리적 집합체(HW)와 운영체제(시스템SW)로 구성된다. 중앙연산장치(CPU)와 그래픽처리장치(GPU)가 1만여개 이상 들어가며 대규모 하드디스크·메모리도 필수다. 또 하드웨어 못지않게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인터커넥팅 기술 등 소프트웨어도 중요하다. 학술적 연구와 공공서비스는 물론, 다양한 분야로의 산업적 활용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기상·기후 예측, 입자물리·천문우주·생명공학 등 거대 계산 분야에선 슈퍼컴퓨터가 필수 연구 인프라다. 실험이 불가능한 핵융합·핵실험 등 국방·안보·에너지 분야에서도 많이 활용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빅데이터, AI와 융합돼 정밀 의료, 농업 기술, 스마트도시, 재생에너지, 자율주행 자동차 등 일상 생활 전반으로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생성 AI 열풍을 일으킨 챗GPT와 같은 서비스도 슈퍼컴퓨터의 활용 없이는 불가능하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이 지난 1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최근 5년간 초고성능 컴퓨팅 연산 수요는 49배나 폭증했지만 자원량은 3.2배 확충되는 데 그쳐 2020년 기준 전체 수요의 480분의 1 수준만 공급하고 있는 실정이다. 2015년에는 연간 연산 수요량 311페타플롭스(Peta FLOPS·PF, 1PF=1초에 1000조번 연산)에 9.7PF(32분의 1)를 공급했지만 2020년엔 15.1엑사플롭스(Exa-FLOPS·1EF는 1초에 100경번 연산 가능=1000PF) 수요에 31.5PF(480분의 1)를 충족하는 데 그쳤다. 1엑사급 슈퍼컴퓨터는 전 세계 인구 80억명이 24시간 매달려서 4년간 풀어야 하는 연산을 1초에 처리할 수 있는 성능을 가졌다. 일반 데스크톱 컴퓨터(200기가플롭스) 약 500만대와 맞먹는다.
해외에선 이미 슈퍼컴퓨팅 역량을 국가 미래 경쟁력을 좌우하는 요소로 보고 적극적인 확충에 나서고 있다. 지난 10년간 세계 1위 초고성능 컴퓨터 연산 성능은 2013년 34PF급에서 2022년 1.1EF 급으로 32배나 향상됐다. 전 세계 총 계산 성능은 지난해 11월 기준 4.9EF이며, 국가별로는 미국이 2132PF, 일본 624PF, 중국 514PF, 핀란드 321PF, 이탈리아 253PF 등의 순이다. 한국은 89PF로 8위에 머물렀다. 특히 미국은 세계 최초로 1엑사급 슈퍼컴퓨터를 도입하면서 앞서나가고 있다. 에너지부(DoE) 산하 오크 리지 국립연구소에 설치된 ‘프런티어(Frontier)’가 지난해 상반기 ICS 평가에서 1.1엑사급 성능을 기록한 것이다. 또 아르곤 국립연구소의 ‘오로라(2EF)’, 오크 리지 연구소의 ‘엘 캐피탄’ 등 추가 엑사급 슈퍼컴 도입도 추진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가 슈퍼컴 5호기인 ‘누리온’은 25.7PF의 성능으로 2018년 기준 세계 11위 성능이었지만 현재 40위권으로 추락한 상태다. 그나마 늘어나는 수요로 월평균 가동률이 99.44%(2022년), 사용률은 74.2%에 이를 정도로 풀 운용되고 있다.
이처럼 수요가 늘면서 정부도 올해부터 2024년까지 총 2929억원 규모의 국가 슈퍼컴퓨터 6호기 도입을 추진한다. 주관기관인 KISTI 국가슈퍼컴퓨팅본부가 3월 셋째주(20~24일) 중 조달청을 통해 입찰을 공고할 계획이다. 2024년 상반기까지 600PF급 초고성능 슈퍼컴퓨터를 도입하기 위해 하드웨어·소프트웨어를 구매하고 시스템 개발 도구 구축 및 운영 지원 등을 목적으로 한다. 구축 완료 시 전 세계 성능 5~10위 수준이 목표다. 안희남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원천기술과 주무관은 "더 성능이 좋은 슈퍼컴퓨터를 구축하려면 전용 건물 구축이나 운영비 등이 추가로 필요하다"면서 "최고보다는 수요와 국내 실정에 맞는 적정 수준의 슈퍼컴퓨터를 구축하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국산 구매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미·중 무역갈등과 기술패권 경쟁, 일본의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수출 규제, 세계적인 공급망 재편 등에 따라 국가 안보상 슈퍼컴퓨터의 자급자족 필요성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국내 초고성능 컴퓨터 시장 규모가 세계시장의 2%대에 불과해 기업들이 뛰어들지 않고 있다. CPU·GPU를 전량 인텔·AMD 등 외산에 의존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대규모 연산을 위한 병렬 처리 환경을 만들고 애플리케이션(앱)을 개발할 수 있는 업체도 없다. 따라서 이번 입찰에도 ‘전통의 강자’인 미국 HPE크레이, 중국 자본이지만 IBM 기술력을 이어받은 레노버, 유럽의 강자인 프랑스 아토스 등 외국 업체 3곳만 참여할 것으로 알려졌다.
국산화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삼성·LG 등 민간 4개 기업이 참여한 가운데 ‘주전산기’ 개발 사업이 진행됐지만 국내시장이 좁아 그만뒀다. 2011년에는 초고성능컴퓨터법이 제정돼 기반 마련을 시작했다. 2016년부터는 1000억원을 들어 HPC 자체 개발에 뛰어든다고 선언했었다. 당시 1PF급 이상을 2020년까지 개발하고 2025년까지는 30PF급을 개발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결과적으로 330억원이 투입돼 시스템 구축 역량 및 커스터마이징 능력 확보 연구가 진행됐다. 또 2020년부터는 5년간 490억원을 들여 자체 CPU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안 주무관은 "미국과 일본은 독자 슈퍼컴퓨터를 개발해 사용할 때 조 단위 예산을 투입한다"면서 "우리나라도 슈퍼컴퓨터 수요가 갈수록 커지고 있고 기업들도 자체적인 구축 노력을 늘리고 있다"고 말했다. 국산 슈퍼컴퓨터 상용화를 위한 시장 여건이 성숙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식 KSITI 국가슈퍼컴퓨팅본부장도 "과거에는 자동차처럼 사다 쓰면 되지 자체 개발할 필요가 없다는 여론이 높았다"면서도 "수요가 늘어나 국내시장 여건이 개선되고 있고 경제 블록화 등에 대비한 국가 안보 측면에서라도 슈퍼컴퓨터를 자급하기 위한 장기적 기술 자립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우리나라가 메모리나 하드디스크를 만들지만 CPU, GPU 등을 수입해야 하고 연결 기술과 소프트웨어 구축 역량은 떨어진다"면서 "외국에 100%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 드러난 만큼 자체적인 기술 개발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