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 구름 낀 문장/함기석

배 한 척이

푸른 콧수염 휘날리며 항구로 들어서고 있다

먼 우주에서 유성우가

해변의 결혼식장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오듯

폭죽이 터지고

장미와 피가 구름에 스민다

저 멀리 도시에서 어둠은 흰 붕대처럼 풀어지고

밤마다 섬 해안선 따라

온몸을 고대의 어휘로 문신한 나신의 여인들이

검고 긴 바늘 춤을 춘다

땅의 입과 하늘의 항문을 촘촘히 꿰매어 움직이도록

숨 쉬도록

나는 어두운 급류

나는 눈보라 치는 사막, 우린 구름 낀 문장

낮과 밤이 사라지고

무모한 장미는 찢긴 눈이 아름답다

하얀 드레스 길게 끌며 바다 위로 걸어오고 있다

또 한 척의 도도한 배가

■ 아름답다. 그러나 나는 모르겠다. 왜 “배 한 척이” “푸른 콧수염 휘날리며 항구로 들어서고 있”는지, 왜 “폭죽이 터지고” “장미와 피가 구름에 스”미는지, 왜 “온몸을 고대의 어휘로 문신한 나신의 여인들이” “검고 긴 바늘 춤을” 추고 있는지, 그리고 “나는” 어찌해서 “어두운 급류”이고 “눈보라 치는 사막”인지 “우린 구름 낀 문장”인지 나는 정말이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름답다.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답다. 눈을 감고 떠올려 보라. 유성우가 쏟아지는 밤, 배 한 척이 길고 하얀 파도를 끌고 도도하게 항구로 들어오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 당신이 서 있다. 자, 이제 시를 다시 읽어 보라. 아름답지 않은가. 시 전체가 당신 앞으로 화르륵 다가오지 않는가.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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