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서의 On Stage]달콤 살벌한 '청춘연가'

청소년극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

청소년이 느끼는 '사랑·우정' 경쾌하게 담아권력·육체·영혼 상징하는 세 인물로 긴장감'록산느의 진정한 연인 누구였을까' 여운 남겨

전쟁터를 찾은 록산느(왼쪽)와 크리스티앙의 재회 장면.

[아시아경제 장인서 기자] "그때 우린 모두 어리석었지. 그리고 환하게 빛났지(연극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 중 시라노의 대사)."청춘(靑春). 10대 후반에서 20대를 포함하는 나이다. 여리고 푸른 잎사귀처럼 빛나는 그 시절을 사람들은 곧잘 푸른 봄에 빗대어 예찬한다. 하지만 성년(청년)과 어린이의 중간시기를 사는 청소년(14~19세)에 대해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덜 성숙한 존재로 여긴다. 여러모로 미완의 시기를 사는 그들에게 인생이란, 또 우정과 사랑이란 무엇일까. 청소년의 시각으로 사랑과 시, 운명을 다룬 낭만 활극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에 해답이 있을지 모른다.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소장 김성제)가 만든 청소년극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가 2년 만에 무대에 올랐다. 2015년 5월 소극장 판에서 초연된 작품은 더 넓은 공간의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관객과 다시 만났다. 에드몽 로스탕이 쓴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가 원작이다. 청소년극임을 감안해 무겁고 우울한 주제를 피해 경쾌한 사랑이야기를 택했다. 극작가 김태형(40)은 5막으로 구성된 원작을 배우 네 명이 출연하는 90분짜리 소극장 공연으로 각색했다. 불 꺼진 객석 앞. 달빛처럼 은은한 조명 아래 무대가 드러났다. 덧마루를 쌓아올린 목조세트와 잎사귀 달린 나무, 밧줄, 사다리 등이 주요 소품이다. 한 편엔 피아노와 바이올린, 타악기가 놓여 있다. 악사가 등장하고 현악연주가 명랑하게 흐른다. 곧이어 등장한 청년 세 명. 젊은 장교 드 기슈, 귀공자 크리스티앙, 어린 시절부터 록산느 곁을 지키며 사랑을 키워온 시라노다.

드 기슈(왼쪽부터), 크리스티앙, 시라노.

원작이 시라노의 안타까운 사랑이야기에 무게를 실었다면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에서는 아름다운 외모에 발랄한 성격의 열정녀, 록산느가 극의 중심이다. 록산느와 그녀를 둘러싼 세 남자. 이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사랑과 진실을 찾아가는 낭만적인 여정을 펜싱 결투 장면의 역동성과 실내악의 감수성으로 리듬감 있게 풀어냈다. 록산느는 기존의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와는 달리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존재로, 청소년들의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찾고자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사랑을 통해 한층 성숙해지는 모습은 늘 깨지고 부딪히며 성장해 가는 청소년들의 모습과 닮았다. 시라노는 당대 최고의 검객이자 시인이다. 그는 아름답고 재기 넘치는 여인 록산느를 오랫동안 짝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유별나게 크고 못생긴 코 때문에 자기의 마음을 선뜻 드러내지 못한다. 드 기슈는 귀족가문의 젊은 장교다. 그 역시 발랄하고 거침없는 록산느에 매료돼 노골적인 애정공세를 펼친다. 그러던 중 록산느는 시라노의 부대에 새로 전입한 미남 청년 크리스티앙과 사랑에 빠진다. 시라노는 크리스티앙 대신 아름다운 시구가 담긴 연애편지를 써주고, 편지를 받은 록산느는 진실된 사랑의 주인공이 크리스티앙이라 굳게 믿는다. 드 기슈는 구애를 거절당한 복수심으로 크리스티앙과 시라노를 전쟁터 최전방에 배치하고,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을 지켜주겠다고 록산느와 약속한다. 시인의 영혼을 지닌 시라노. 그는 남루한 외투 안에 백조 깃털로 만든 펜을 품고 다닌다. 눈에서 심장으로 흘러내리는 사랑. 그의 입술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은유 가득한 대사들은 지금 막 사랑의 감정이 싹트는 청소년들에게 그 마음의 진정성과 깊이를 헤아리게 만든다. 극작가는 '각색의 글'로 남긴 후기에서 이 작품이 극 중 록산느 대사처럼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기 위해 애쓰는 마음'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그는 "여전히 사랑을 모르겠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랑 너머의 그 무엇이 아닌 사랑이라는 행위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변화나 징후 등 사랑과 함께 오는 것들이란 사실을 알았다"고 털어놨다.

시라노(왼쪽)과 크리스티앙의 결투 장면.

록산느에게 진정한 연인은 누구였을까. 극의 마지막, 세월이 흐르고 흘러 시라노의 마지막 편지가 뒤늦게 낭독되는 순간까지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각각 권력(드 기슈), 육체(크리스티앙), 영혼(시라노)을 상징하는 세 인물이 벌이는 사랑의 줄다리기가 너무 팽팽했던 탓이다. 또한 여러 모양을 지닌 사랑의 속성을 대등하게 다룬 연출가의 의도 때문이기도 했다.연출가 서충식(57)은 최근 인터뷰에서 "이 작품은 매순간 성장하는 우리들을 위한 이야기다. 외모뿐 아니라 사회적 조건, 진정성, 영혼과 같은 주제들이 어느 하나만 두드러지지 않고 고루 생각할 거리를 주고 있다"면서 "청소년 시기에는 보이는 것, 성인이 되면 사회적 조건, 나이가 들어서는 상대의 심성이 중요해지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어 그는 "시라노가 워낙 정의롭고 낭만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청소년극 특유의 교훈적인 느낌을 덜어내고자 했다"면서 "공연을 본 청소년들이 '사랑이 도대체 뭐지?'라고 스스로 물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덧붙였다.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는 공연제작 과정에서 청소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작품에 반영했다. 2015년에는 청소년 열다섯 명, 올해는 열일곱 명이 제작진과 함께 연극활동과 공연팀 연습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성인에게는 익숙하지만 청소년에게는 낯선 장면이나 대사가 청소년의 관점에 맞게 바뀌었다. 초연 때 활약한 하윤경(록산느), 안창환(시라노), 안병찬(크리스티앙), 김지훈(드 기슈) 외에 정현철(북치는 소년)이 새로 합류했다. 연주는 김하정ㆍ권오현ㆍ김진호가 맡았다. 12세 이상 관람 가능하며 오는 21일까지 서울 용산구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한다.

드 기슈(왼쪽)과 록산느의 대화 장면.

◆원작 들여다보기: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Cyrano de Bergerac)'= 프랑스 작가 에드몽 로스탕(1868~1918)이 1897년 발표한 5막짜리 운문희곡이다. 1897년 파리 포르트 생마르탱 극장에서 초연됐다. 17세기 프랑스, 당시 유명한 문필가였던 시라노 드 베라주라크(1619~1655)의 일생을 모티브로 삼았으나 실제 인물의 전기적 사실과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는다. 기형적으로 큰 코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친구를 위해 대필하는 편지 속에 마음을 담아야 했던 시라노의 낭만적 사랑을 그리고 있다. 삼각관계라는 긴장 구도와 활극의 역동성, 이야기 속 숨은 유머 등이 큰 인기를 끌며 초연 때부터 현재까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상연되고 있다. 프랑스와 미국에서 여러 차례 영화로 제작됐으며 국내에서는 2010년 개봉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이 작품의 제목과 모티브를 일부 활용했다. 올해 7월에는 뮤지컬 '시라노'가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될 예정이다.장인서 기자 en1302@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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