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식업과 숙박업의 대명사인 주막, 정말 삼국시대부터 개업했을까?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 나온 주모 모습(사진= KBS2 TV 구르미 그린 달빛 캡쳐)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어느 시대를 다룬 사극이던 우리나라 사극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감초 배역이 있다. 주인공이 주막(酒幕)에 가면 항상 산전수전 다 겪은 인상에 행주치마로 손을 문지르며 국밥 한그릇 말고 가라며 나오는 주모(酒母)다. 사극에서 나오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주모의 모습은 대체로 비슷비슷하다. 시대별로 변하는 것은 의상의 변화, 나무숫가락에서 은수저로 바뀌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모두 잘못된 내용이라고 한다. 주막이 활성화되기 시작한건 18세기부터라 그 전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주막이란 것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수도와 지방 대도시에 술을 전문적으로 파는 주점은 18세기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여행객을 상대로 숙박업과 요식업을 동시에 하는 주막은 없었다고 한다. 주막이란 단어가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도 1703년으로 알려져있다. 사극에서는 고구려 시조인 주몽도 자주가던 그 주막이 왜 실제로는 이렇게 늦게서야 등장하게 된 것일까? 이 사극과 현실의 괴리를 풀어줄 열쇠는 다름아닌 엽전, 즉 화폐에 있다.
상평통보 모습(사진=위키백과)
우리나라에서 민간 전체에 화폐경제가 정착하게 된 것은 상평통보(常平通寶)가 발행된 숙종 4년(1678년) 부터의 일이다. 이후 본격적인 화폐사용이 시작됐고 상업이 발전하면서 지역 간 교류가 활발해졌고 여행객과 장사꾼을 상대로 한 요식업 및 숙박업소로서의 주막이 전국적으로 세워지기 시작했다. 화폐의 민간사용이 늦었던 이유는 사람들이 화폐를 좀처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려, 조선왕조에 걸쳐 화폐 정착을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화폐는 정착되지 못하고 물물교환이 많이 이뤄졌다. 화폐 가치는 수시로 변하고 조정의 정책도 혼선을 빚은데다 막상 조정도 화폐 가치를 믿지 못하고 세금을 다 현물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폐경제가 정착되기 이전에는 여행객들을 고객을 받을만한 주막을 만들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상업발달이 미비하다보니 여행객은 주로 지방 파견을 가는 관리들이나 과거시험을 보러가는 응시생으로 제한됐고 이렇게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고객을 상대로 상시 열어둘만한 숙박업소를 차릴 이유가 없었던 셈이다. 그나마 자주 볼 수 있는 고객인 관리들은 대부분 국가에서 운영하는 역참(驛站)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민간 숙박업소를 이용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조선 중기까지 과거응시생들이나 여행객들은 한번 한양으로 가기 위해 막대한 분량의 식량과 말먹이 등을 가지고 가야했고 여기엔 많은 자금이 들어갔다. 더구나 도로시설이 미비하고 야간엔 도심지가 아니면 불빛 하나 없던 시대기 때문에 혼자 여행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동은 주로 여럿이 한꺼번에 모여 낮에 하고 밤에는 야영지를 만들어 잤다. 다행히 고을을 만나 잠을 청할 경우에는 그 동네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숙박료로 낼 쌀을 주고 방을 한칸 얻는 것이 고작이었다. 또한 제대로 된 지도를 기대하기도 힘들고 애초에 평민들이 지도를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대부분 여행객들은 각 마을 어귀에 세워진 장승을 보고 방향을 잡았다. 장승의 몸통에는 흔히 이웃마을까지 거리가 써있어서 이정표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단원 김홍도 풍속화에 나온 주막(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러다가 생긴 주막이니 풍찬노숙(風餐露宿)을 일상으로 알던 조선의 여행객들에게는 반가운 일이었겠지만 구한말 조선을 찾은 외국인들에게 주막은 별 한개조차 줄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한 숙소였다고 한다. 러시아의 첩보장교로 구한말 조선에 파견왔던 카르네프 대령은 "조선의 가옥과 주막은 모두 아주 작고 수십명이 끼어서 자기 때문에 불편하다"고 회상했다. 사실 주막은 주 수입원이 요식업에서 나왔고 숙박은 일종의 부업이었기 때문에 숙박 서비스가 그리 좋진 않았다고 한다. 조선 영·정조 시기 학자인 황윤석의 기록에 의하면 주막에서 잠만 잘 경우에는 사람 1인당 10푼, 말도 한 필당 10푼이며 식사는 한끼에 40푼으로 식사비가 숙박비의 4배나 된다. 술도 1잔에 15푼, 떡도 20푼으로 나와있는 것을 보면 숙박비는 거의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보니 주막의 잠자리는 이불도 따로 없고 위생상태도 좋지 않았으며 먼저 떠난 여행객들이 어지럽힌 채로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집떠나면 고생'이란 말이 괜히 생겨난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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