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여덟 살 순정마초의 꼼꼼한 채색

재난영화 '터널' 정수役 하정우, 남성적 외모로 '마초' 역할 자주 맡아
소품까지 치밀하게 계산하는 연기파 '촬영음식 다 먹어…맥주 1만㏄ 마시기도'

하정우[사진=백소아 기자]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터널'은 재난영화다. 무너진 터널 속에 갇힌 정수(하정우)가 구조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개인적 고통의 의미는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정수의 성격이 낙천적이다. 사방이 콘크리트 잔해로 막히고 구조마저 더디지만 허허실실로 위기를 극복한다. 김성훈 감독(45)이 그리는 블랙코미디의 뼈대다. 가장(假裝)과 캐리커처의 반복으로 극한의 상황에 광기를 부여한다. 답답하고 어두운 기운을 그대로 전하는 소재원 작가(33)의 동명소설과 차이를 뒀다. 김 감독은 "126분의 러닝타임에서 1인극이 절반가량이다. 대중영화로서 절박한 내용을 그대로 담기에 한계에 있었다"고 했다. 그는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64)의 '캐스트 어웨이(2000년)'를 많이 참고했다. 긍정적으로 무인도 환경에 적응하는 척 놀랜드(톰 행크스)처럼 정수를 그린다면 지루함을 없앨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고 했다. 이런 구성은 단계별 설정만큼 주연의 연기가 중요하다. 까딱 잘못하면 영화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김 감독은 각본을 쓸 때부터 하정우를 떠올렸다. 김병우 감독(36)의 '더 테러 라이브(2013년)'에서 전체의 70%에 가까운 1인극을 무난히 해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정수와 닮은 면이 많다고 느꼈다. 그가 생각하는 하정우는 엉뚱하고 천진난만한 성인이다. "서른여덟 살이지만 어린아이 같아요. 장난치는 모습이 날듯이 활발하고 생기가 넘치죠. 또래 배우에게서 볼 수 없는 매력이에요."▲순정마초하정우의 외모는 지극히 남성적이다. 작지 않은 얼굴, 듬성듬성 난 수염. 피부과 단골일 만큼 여드름 자국도 많다. 마초에 가까운 배역을 두루 맡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2005년)'의 유태정, '비스티 보이즈(2008년)'의 재현, '황해(2010년)'의 김구남,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의 최형배, '허삼관(2014년)'의 허삼관 등이다. 모두 야성미가 넘치면서 단순무식하다. 그는 넉살스런 유머를 더해 단조롭기 쉬운 위험을 피한다. 사전에 제작진을 만나 치밀하게 계산하고 촬영장에서 계획대로 연기한다. 그래서 나쁜 짓을 하는 배역도 미워할 수 없게 바꿔놓는다. '아가씨(2016년)'의 백작이 대표적이다. 비스티보이즈, '멋진 하루(2008년)' 등에서 드러낸 능청스러움에 순박함을 첨가했다. "거칠면서도 귀엽게 보이고 싶었는데 박찬욱 감독도 좋아했어요. 연기할 때마다 박수를 치며 들썩이셨죠."

하정우[사진=쇼박스 제공]

터널에서 정수의 면면도 비슷하다. 불의의 사고를 당했지만 금세 평정을 찾고 생존 방법을 모색한다. 긴장한 기색은 콘크리트 잔해가 떨어질 때를 제외하고 찾을 수 없다. 함께 갇힌 미나(남지현)가 숨지기 전까지 천진난만한 아이의 얼굴을 보여준다. 카메라와 음악도 여기에 동조한다. 금방 구겨질 것 같던 자가용을 안방처럼 묘사하고, 생존도구를 찾는 신에 애니메이션 '톰과 제리' 콘셉트의 경쾌한 음악을 삽입한다. 하정우는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 고개를 갸웃했는데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신들이 앞에 배치돼 괜찮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빵집에서 케이크를 사면서 흥정하고, 달변으로 렌트카 사장을 설득하는 신이 삭제돼 아쉽다. 빠른 전개와 긴장 유발을 우선한 것 같다"고 했다. 김성훈 감독은 "하정우의 연기만으로 충분히 설명된다"고 했다. 대표적인 예로 대경(오달수)과 막내대원(조현철)이 울리는 자동차 경적에 정수가 보이는 반응을 꼽았다. "'네, 들려요'라는 대사를 흥분에 젖어 외치는데, 목소리가 어린아이가 '아이스크림 사주세요'라고 조르는 것처럼 해맑게 들렸다. 부연이 사족이 될 것 같았다." 하정우는 시나리오에 간단하게 설명된 내용도 스스로 구체화했다. 특히 동선을 짜면서 미술세트와 소품에 집착했다. 상대 반응이 없는 1인극의 단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워셔액으로 시트를 닦고 유리조각을 치우다 손을 베이는 장면 등을 직접 고안했다. 미나가 죽기 전까지의 내용이 따분하게 흐를 수 있어서 어떤 물건을 어떻게 활용할지를 놓고 고민을 많이 했다"고 했다. 하정우는 "더 테러 라이브에서 1인극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롤러코스터'와 허삼관을 연출하면서 디테일에 대한 고심이 깊어진 것 같다"고 했다.

하정우[사진=백소아 기자]

▲디테일 하정우는 정수와 달리 겁이 많다. 롤러코스터와 같은 놀이기구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엘리베이터가 잠시만 멈춰도 숨이 막힌다. 터널에서 헬리콥터 신도 울며 겨자 먹기로 촬영했다"고 했다. 그는 "그래도 '군도: 민란의 시대(2014년)'에서 말을 타고 질주한 신보다는 덜 무서웠다. 서른 마리가 한꺼번에 달리는데 내가 맨 앞에서 가장 빠른 녀석을 탔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이를 악 물었다"고 했다. 김성훈 감독은 "겉으로는 무서워하지만 한 번 결심하면 세세한 연기까지 놓치지 않는다"고 칭찬했다. 그의 말처럼 하정우는 세부적인 표현에 강하다. '먹는 방송'이라는 수식어도 그래서 생겼다. 황해에서는 갓 삶은 감자,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서는 막 요리한 양장피와 탕수육을 고집했다. "촬영할 때 주는 음식을 모두 먹다보니 식은 것은 내키지 않는다. 제작진에게 항상 김이 모락모락 날 만큼 뜨거운 음식을 달라고 주문한다. 그런 요리를 씹고 넘기는 소리까지 내다보니까 '먹는 방송'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듯하다." 최근 촬영한 텔레비전용 맥주 광고에서도 그는 무알콜 맥주를 1만cc나 들이켰다. 집으로 돌아가 화장실에서 몇 시간 동안 변기와 씨름했다. 그는 "그 정도 후폭풍은 감수할 수 있다. 다만 진지하고 심각한 신에서 먹는 장면으로 웃음이 터지면 몰입에 방해가 된다"며 "터널에서 개 사료와 물 먹는 장면이 화제가 돼 놀랐다. 심각한 상황에 다다르면 먹는 장면을 피할 것 같다"고 했다. 경계하는 연기는 하나 더 생겼다. 스크린을 통해 드러나는 외형이다. 한 달 넘게 갇히는 설정으로 다이어트를 강행했는데 체중에 변화가 없는 것처럼 나타났다. 그는 "영영사가 짜준 프로그램에 맞춰 충분히 감량했다고 생각했는데 부족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전히 연기는 어렵다"고 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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