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안 미로 특별전⑤]스페인 암흑기 예술가, 그 속에 피카소가 보인다

전쟁 공포 주제로 '죽음의 신' 등 사실주의 작품 그려

'죽음의 신(추수하는 사람)'을 그리는 호안 미로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1966년 어느날, 시각예술가 롤랜드 펜로즈는 런던 말보로갤러리를 찾았다. 친구를 인터뷰했다. 호안 미로였다. 세로줄무늬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고 검은 구두를 신은 그는 29년 전 자신이 그린 작품의 상징을 설명했다. "포크는 사과를 공격한다. 포크는 총검과도 같다. 사과는 스페인이다." 펜로즈는 파시즘을 향한 반감이 분명히 전해졌다고 저서 '호안 미로'에 썼다. 미로가 설명한 그림은 '낡은 구두가 있는 정물(1937년)'이다. 스페인 내전의 공포를 담았다.사상의 정열이 역사를 움직인 시대. 스페인은 농업, 지역자치, 노동운동 문제 등이 얽혀 사회ㆍ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사회당 계통의 노동자총동맹과 무정부주의자 그룹인 노동자국민동맹은 인민전선을 구축해 1936년 2월 총선에서 과반수의 지지를 얻었다. 총선에서 패한 대지주들과 부르주아들은 범 파시즘 세력을 형성하고 폭탄 테러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인민전선 정부를 방해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왕당파 지도자가 피살되자 보수 기득권 세력을 등에 업은 군부는 1936년 7월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두 스페인의 충돌은 사실상 국제전이었다. 소련과 멕시코가 공화국 정부군을, 독일과 이탈리아가 반란군을 지원했다. 싸움은 1939년 3월28일 반란군이 마드리드를 함락하면서 끝났다. 2년9개월간의 내전에서 30만 명 이상이 죽었다. 공화국 정부군과 민간인 40만 명은 프랑스로 망명했다. 승리를 이끈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았다. 그는 1975년 11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스페인을 통치했다.

'낡은 구두가 있는 정물'

미로는 친구 피에르 르베르디가 빌려준 파리의 조그만 방에서 조국의 현실을 직시했다. 낡은 구두가 있는 정물에는 당시의 생각이 집약돼 있다. 그는 소재로서 익숙한 사과, 빵, 포도주, 구두를 이용해 재난의 분위기를 담았다. 하늘에서 팔처럼 내려온 잔혹한 포크가 사과를 관통한다. 너덜너덜한 포장지로 싼 병은 불에 탄 듯 뒤틀리며 검게 변했고, 반쯤 먹은 빵은 말라서 식욕을 잃게 한다. 낡은 구두는 형태가 망가져 쓸모가 없어졌다. 미로는 그해 여름 그린 '죽음의 신(1937년·추수하는 사람)'에서도 파괴의 위협을 받는 세계를 극적인 이미지로 표현했다. 카탈루냐 농부를 그렸는데, 이전의 동일한 소재를 다룬 그림에 넣지 않았던 격한 폭력성을 담았다. 특정 인물이나 사건과 결부되지 않지만 고향과 용감한 그곳 사람들에 대한 미로의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 기댄 호소는 시간과 물질세계의 한계를 넘어서도 영혼이 항행하는 공간 감각이 있다.

'게르니카'

죽음의 신은 파리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걸렸다. 피카소의 대표작 '게르니카'와 함께 전시됐다. 스페인내전의 참상을 세계에 널린 알린 작품이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에 있는 작은 도시. 1937년 4월26일 프랑코의 지원 요청을 받은 독일은 이곳에 폭격기를 보냈다. 도시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됐다. 피카소는 분노했고, 한 달 만에 이를 주제로 작품을 만들었다. 죽은 어린 아들을 안고 절규하는 어머니, 도움을 구하는 남녀, 상처입고 울부짖는 말, 칼을 쥐고 땅바닥에 쓰러진 사람, 무심한 눈빛의 소. 전쟁과 파시스트를 향한 증오와 분노를 명료하게 드러냈다. 피카소는 "모든 스페인 작가들처럼 나도 사실주의자"라고 했다. 펜로즈는 "이 말은 미로에게 해당될 수 있고, 실제로도 그러하다"고 했다. "현실을 마주한 미로의 태도에서 보이는 역설적 성향은 그와 동시대 화가이자 동향인인 피카소와의 예술적 관계에서 한층 드러난다"고 했다. 미로는 캔버스 밖에서도 용감했다. 프랑코의 탄압에 테러를 감행한 바스크인들이 부르고스 재판(1970년)에서 사형을 선고받자 카탈루냐 미술가, 지식인과 연대해 몬트세라트 수도원까지 시위행진을 했다. 프랑코 체제의 모든 문화를 "단순히 피부 속의 할퀸 자국에 불과하다"고 폄하하기도 했다. 이 자국이 아물려면 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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