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아주 사소한(?) 직업의식

이의철 금융부장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브리 라슨은 영화 '룸'에서 고립된 공간에 갇힌 여성의 절망과 희망을 연기한다. 브리 라슨이 분한 여주인공 조이는 17살 때 길에서 납치돼 무려 7년간 두 평 남짓한 룸에 갇혀 지낸다. 브리 라슨의 연기는 썩 괜찮았고, 여주인공이 룸에서 출산한 아들 잭으로 분한 제이콥 트렘블레이의 연기는 놀라웠다. 필자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대목이 있다. 잭이 죽은 것으로 위장해 담요에 둘둘 말려 룸에서 탈출한 뒤 트럭 짐칸에 실려 어디론가 이동하는 장면. 잭은 엄마가 사전에 일러준 대로 트럭이 신호에 걸려 멈추자, 트럭에서 뛰어내려 무작정 뛴다. 다행히 주택가였고 개와 산책을 하던 동네 주민과 부딪혀 잭은 넘어진다. 잭의 생물학적 아버지이자 납치범은 자신이 속은 것을 깨닫고 운전석에서 내려 잭을 다시 강제로 데려가려 한다. 동네 주민은 잭에게 "괜찮냐? 다친데 없냐?"라고 묻는데, 납치범은 "신경 쓰지 말라. 내 아이다"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여기서 빛나는 시민의식. 주민은 "당신 누구냐? 경찰을 부르겠다"며 납치범을 제지한다. 평범한 동네주민의 이 행동이 어린 아이의 목숨 하나를 살린다.

영화 '룸(2015)'의 한 장면.

이어 신고를 받고 출동한 여성 경찰 파커는 잭에게서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잭은 세상을 처음 접한 충격(파란하늘을 처음 본다)에 일시적 기억상실에 걸려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여자 경찰은 아이를 안심시키며 대화를 끌어내 아이가 '그 어떤 범죄의 피해자'임을 알아낸다. 그리고 잭의 진술을 토대로 룸의 위치를 파악한다. 파트너인 동료 경찰은 "그냥 길을 잃은 아이니 경찰서에 데려다주자"고 말한다. 만약 동료 경찰의 말대로 그저 실종된 아이로 처리돼 중요한 몇십 분을 놓쳤다면 잭의 엄마 조이는 분노한 납치범에게 살해당했을 것이다. 평범한 여성 경찰의 직업의식이 한 생명을 구했다. 이 영화는 실화에 기초했다. 기자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보도록 훈련받는다. 파장이 큰 사건이 발생하면 습관적으로(?) 사안의 배후에 가려진 시스템을 보려고 한다. 그렇게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한 기사는 데스크로부터 칭찬을 받고, 운이 좋으면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기도 한다.기자들의 이런 직업의식은 빛나는 특종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구의역 사망사고의 배후에 비정규직의 고단한 삶이 있음을, 가습기 살균제 사건엔 우리사회의 조직적인 무관심이 있음을 밝혀낸다. 조선ㆍ해운산업의 구조조정 이면엔 정부, 국책은행, 기업의 교묘한 먹이사슬이 얽히고설켜 있음을 보도한다. 하지만 구조적인 문제만 볼 뿐 디테일을 보지 못한다면 그 보도는 필시 왜곡되고야 만다. 나아가 사건의 총체적인 실체를 알기란 더욱 어려워진다. 여기에 기자정신과 종종 혼돈되는 '공명심'까지 더해진다면 기사는 더욱 산으로 가게 된다. 거악(巨惡)과 불의(不義)에 대항한다는 대의명분이 뚜렷한 기사일수록 더욱 그렇다. 팩트와 디테일이 없는 담론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세월호 이후 2년이 지났다, 많은 언론들이 그간 숱한 담론들을 제시해왔지만 우리사회엔 어떤 변화가 있었나. 이 순간에도 '안방의 세월호', '구의역의 세월호', '섬마을의 세월호'가 벌어지고 있다. 이어서 사건의 배후와 구조적인 모순과 우리사회의 고질적인 먹이사슬(이를 한마디로 '적폐(積弊)'라고 대통령은 말했다)을 지적하는 언론의 보도, 그리고 나오는 정부의 지극히 즉자적이고 표면적인 대책. 신문지상에서 보도가 사라지는 시점을 전후해 슬그머니 잊히는 사건. 매번 판박이처럼 반복되는 전개과정이다. 거악에 분노하고, 불의에 항거하며, 적폐를 없애려는 노력은 중요하다. 그것은 사회를 보다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첫걸음이다. 하지만 진정 사회를 바꾸는 힘은 아주 사소한 직업의식으로 무장한 평범한 우리의 이웃 일는지도 모른다.이의철 금융부장 charlie@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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